무식했는데도 용감했던 그분 [뉴스룸에서]
김원철 | 사회부장
요설이 넘쳐 정신이 혼미할 땐 법전을 읽습니다. 법치주의 국가니까요. ‘채 상병 순직 사건’ 외압 의혹에선 ‘군사법원법’ ‘군사경찰직무법 시행령’ ‘군사경찰범죄수사규칙’ ‘법원이 재판권을 가지는 군인 등의 범죄에 대한 수사절차 등에 관한 규정’을 읽으면 됩니다. 전문을 볼 필요 없습니다. 조문 몇항 읽으면 깨달음이 올 겁니다. ‘해병대 수사단은 이 사건 수사권이 없다. 수사 행위가 아니므로 수사 개입이 아니다’라는 논리가 얼마나 무식하고 용감한 것인지를요.
―(민간) 법원은 군인이 사망한 경우 그 ①원인이 되는 범죄에 관해 재판권을 가진다.(군사법원법 2조 2항 2호)
―군사경찰관이 수사 과정에서 민간 경찰 직무 범위에 속하는 범죄를 ②알게 되면 ③수사를 중지하고 ④군사경찰부대·수사부대의 장의 지휘를 받아 경찰에 ⑤이첩하여야 한다.(군사경찰범죄수사규칙 21·22조)
―군검사 또는 군사법경찰관은 민간 법원이 재판권을 가지는 범죄가 발생했다고 ⑥의심할 만한 정황을 발견하는 등 범죄를 인지한 경우 ⑦지체 없이 경찰청 등에 사건을 이첩해야 한다.(법원이 재판권을 가지는 군인 등의 범죄에 대한 수사절차 등에 관한 규정 7조 1항)
군인 사망 시 민간 경찰에 관할권이 있는 범죄는 사망의 원인이 되는 범죄(①)입니다. 군사경찰은 원인이 되는 범죄, 즉 업무상 과실치사 등을 알게(②)되면 수사를 중지(③)하고 이첩해야 할 의무(⑤)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가 ‘알게 되면’에 해당하는지에 관해선 ‘범죄가 발생했다고 의심할 만한 정황(⑥)을 발견하면’이라고 예를 들고 있습니다. ‘범죄가 성립하겠구나’라는 인식이 들면 이첩하라는 뜻입니다.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 등 8명이 업무상 주의의무를 소홀히 한 과실로 익사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병대 수사단의 발표 자료에 명기된 이 표현은 ‘사망의 원인이 되는 범죄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뜻입니다. 이첩 의무가 발동한 근거를 설명한 문장입니다. ‘인지’했으므로 ‘이첩’한다는 말로, 한 글자도 법령에서 어긋난 게 없습니다.
―범죄를 알게(②) 되면 수사를 중지(③)하고: ‘해병대 수사단의 행위는 수사가 아니었다’라는 논리도 궁색합니다. 범죄를 알기 전까지 군사경찰이 벌인 활동은 당연히 ‘수사’(③수사를 중지하고)입니다. 군인 사망의 원인이 되는 범죄가 있을지 없을지를 파악하기 위해 수사권을 가진 기관이 증거를 수집하고, 검시하고, 현장 감식을 하는 것. 사망 동기와 원인, 경위 등을 파악하기 위해 부검하고, 금융·통신 자료 등을 조회하기 위해 영장을 신청하는 것 등이 수사가 아니면 무엇일까요? 지금 이 시간에도 전국 검경에서는 범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한 수많은 활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게 수사가 아니다. 따라서 독립성을 보장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는 걸까요?
―군사경찰부대·수사부대의 장의 지휘(④)를 받아 경찰에 이첩: 이첩 행위의 결정권자는 군사경찰부대장입니다. 박정훈 해병대 수사단장입니다. 그가 지휘자이며 최종 결재권자입니다. 군사경찰 전자결재시스템에는 해병대 사령관, 국방부 장관 등의 지휘 내용을 표기하거나, 그들이 결재를 할 수 있는 방식 자체가 탑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사건의 간단하고 명료한 줄거리입니다. 인지했으므로, 권한 있는 자의 지휘로, 이첩한 것입니다.
―인지한 경우 지체 없이(⑦) 이첩: 사단장을 제외하라고 하지 않았고, 단지 법리 검토가 필요해 이첩을 보류하라고 지시한 것이라는 해명은 자백에 가깝습니다. 지체 없이(⑦) 이첩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선택이 아닌 의무입니다. 보류나 재검토가 들어설 자리는 없습니다.
단순 명쾌한 이 세계가 뒤죽박죽이 된 건 무식했는데도 용감했던 누군가 때문입니다. 그는 아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해병대 수사단의 사건기록은 1100쪽이 넘고, 수사단은 외부의 누구에게도 수사 내용을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이 수차례 수사 내용을 요청했지만 묵살했습니다. 마지막에 가서야 언론에 배포될 보도자료를 조금 빨리 건넨 게 전부입니다.
4일 국방부 조사본부가 군사법원에 해병대 수사단 사건기록을 재검토한 뒤 작성한 첫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사단장의 어떤 행동과 어떤 지시가 병사들을 위험천만한 물속으로 내밀었는지. 무식했지만 용감했던 누군가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이런 일로 사단장을 처벌해야, 이런 일로 병사들이 다치지 않습니다. 죽지 않습니다. 그런 국가를 가질 권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won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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