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늦깎이' 日 완성차들 뛰어들더니…'K-배터리' 구하느라 급해졌다
中 배터리는 미국 제재, 日 배터리는 물량 부족…국내 업계 "물밑 논의 바빠져"
(서울=뉴스1) 최동현 기자 = '전기차 늦깎이' 일본 완성차 제조사(OEM)들이 최근 대규모 전기차·배터리 투자에 나서면서 일본 시장이 국내 배터리 업계의 새로운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떠올랐다. 일본 완성차 업체들은 유럽(EU)과 북미 시장을 겨냥하고 있어 사실상 'K-배터리'가 최대 공급처로 역할을 할 것이란 전망이다.
6일 외신과 업계 등에 따르면 미베 도시히로 혼다 사장은 지난달 16일 도쿄에서 설명회를 열고 오는 2030년까지 전기차와 소프트웨어 분야에 10조 엔(88조 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이는 혼다의 기존 전기차 투자금(5조 엔)을 두 배로 늘린 규모로, 차세대 공장 신설 등을 포함한 차량 제작에 6조 엔(약 52조 2000억 원), 전기차 배터리와 소프트웨어 개발에 각각 2조 엔(약 17조 4000억 원)을 투입할 방침이다.
도요타는 지난 2월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생산을 위해 미국 켄터키주 공장에 대한 13억 달러(약 1조 8000억 원) 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4월엔 인디애나주 공장에 14억 달러(약 1조 9000억 원)를 투자해 전기차 생산시설을 확충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10월 노스캐롤라이나주 전기차·배터리 생산 라인에 80억 달러(약 11조 원)를 추가 투자한 것까지 합치면 전동화 전환에만 총 139억 달러(약 19조 원)를 쏟아붓는 셈이다.
닛산도 지난해 말 유럽 생산 거점인 영국 중부 선덜랜드 공장에 20억 파운드(약 3조 3000억 원)를 추가 투자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신형 전기차 3종을 생산하고 배터리 공장도 신설한다는 포석이다. 닛산은 이미 선덜랜드 공장에 10억 파운드(약 1조 7000억 원)를 투입한 바 있어 전체 투자금은 최대 30억 파운드(약 5조 1000억 원)로 늘어날 전망이다.
일본 자동차 업체 간 '전기차 동맹'도 가속하는 양상이다. 일본 2·3위 자동차 업체인 혼다와 닛산은 지난 3월 포괄적 협업을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 검토 각서를 체결했고, 지난달엔 도요타·혼다·닛산 3사가 차량 탑재용 소프트웨어 공동 설계를 검토하기로 했다. 3사는 다른 일본 완성차업체인 스즈키와 마쓰다, 스바루, 미쓰비시자동차 등과의 협력도 저울질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타 완성차 업체에 비해 전동화 전환에 소극적 태도를 보여 '전기차 지각생'으로 불렸던 일본 기업들이 일제히 전기차·배터리 투자에 나선 것은 의외다. 업계에선 '전기차 캐즘'(Chasm·일시적 수요 둔화)을 계기로 일본 완성차들이 반전을 꾀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수의 해외 경쟁사들이 올해 투자 계획을 축소하거나 미루는 등 속도 조절에 나선 사이, 지난해 엔저(円低)와 하이브리드 전략으로 역대급 실적을 올린 일본 완성차 업체들이 대규모 투자로 전동화 격차를 좁히는 이른바 '틈새 공략'에 나섰다는 것이다.
일본 업체들의 전동화율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도요타는 지난해 1123만 대의 자동차를 팔아 사상 최고 실적을 냈지만, 이중 전기차 판매 비중은 1.8%(20만 3377대)에 머물렀다. 닛산의 전기차 판매 비중은 3.4%, 혼다는 0.9%에 그쳤다. BMW(20.7%), 벤츠(16.9%), 폭스바겐그룹(10.8%) 등 경쟁 업체들이 전기차 판매 비중을 두 자릿수까지 끌어올린 것과 대비된다.
EU와 미국의 강도 높은 '전기차 규제'도 일본 업체들의 전동화 전환 속도를 높이는 이유다. 미국 환경보호청(EPA)이 지난 3월 발표한 규제안에 따르면 2032년까지 전체 판매 차량 중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차의 비중을 각각 56%, 13%로 높여야 한다. EU는 2035년부터 내연기관차의 판매를 완전 금지한다.
업계에선 일본이 국내 배터리 업계의 '제2의 시장'으로 부상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완성차 업체들은 그간 CATL, BYD(비야디), CALB, LISHEN(리선) 등 값싼 중국산 배터리를 채택했는데,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충족하기 위해선 '대체 공급처'를 찾아야 해서다. 자국 배터리 제조사인 파나소닉만으로는 일본 완성차 업계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미 일본 완성차 업체와 한국 배터리 제조사 간 협업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국내 1위 배터리사인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2022년 혼다와 미국 합작법인(JV)을 세우기로 하면서 최초의 '한일 배터리 동맹'을 체결했다. 지난해 10월에는 도요타와 연간 20기가와트시(GWh)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장기 공급 계약을 맺었다.
일본 완성차 업체들이 전기차·배터리 투자를 본격화하면서 양국 기업들 간 물밑 논의가 더 활발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 완성차 업체들이 EU와 북미 시장을 겨냥한다면 배터리의 탈중국이 필연적"이라며 "(자국 기업인) 파나소닉보다 북미 공장을 훨씬 많이 짓고, 수율과 제품 포트폴리오가 검증된 한국산 배터리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했다.
다른 업계 관계자도 "LG에너지솔루션 외에도 다른 제조사(SK온과 삼성SDI)와 일본 완성차 업체 간 논의가 전보다 많아진 것으로 안다"며 "일본은 단기간에 전기차 판매 비중을 높여야 하는 만큼 양국 기업 간 거래선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dongchoi89@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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