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로드 작전' D-데이 6월6일…왜 그날? [노르망디 상륙 80주년①]

구자룡 기자 2024. 6. 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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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뜨는 달과 새벽 간조’ 등 조건 50분의 1 확률로 택일
상륙 암호 감청하고도 무시한 독일의 ‘정보 실패’로 희생 줄여
[서울=뉴시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개됐던 프랑스 북서부의 노르망디에 '1944 노르망디 전투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사진출처 노르망디 전투 기념관 홈페이지), 2024.06.06.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구자룡 기자 = 6일은 1944년 6월 세계 2차 대전에서 독일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전환점이 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에서의 80주년 기념식에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에마뉴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 서구 25개국 정상이 참석한다. 러시아(소련)는 당시에는 연합국의 일원이었으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초청받지 못했다.

연합군 병력 300여만 명이 동원된 사상 최대 상륙작전의 사연은 무궁무진하지만 D-데이를 왜 그날로 잡았고, 그날 독일의 어떤 '정보 실패'가 연합군의 피해를 줄였는지, 6년 후 발생한 6·25 전쟁과는 어떤 인연이 있는 지 등을 2회에 걸쳐 조망한다.

암호명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ad)'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왜 그 날 이뤄졌나?

소련의 ’제 2전선‘ 요구도 한 요인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후 스탈린은 연합국에 ‘제 2 전선’을 요구했다. 유럽 서부에서 독일군을 압박해 동부전선에서 소련에 대한 압박을 줄여달라는 것이었다.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에서 루스벨트와 처칠은 스탈린에게 이듬해 5월 상륙 작전을 벌이겠다는 언질을 주었다. 사실 그해 5월 최고연합사령부를 조직해 준비 해오고 있었다.

상륙 작전에는 미군 170만, 영연방군 100만, 프랑스 폴란드 체코 벨기에 노르웨이 네델란드의 망명 정부군 합쳐 300만 명 가량이 동원됐다.

병력과 물자 수송을 위해 163개의 비행장이 새로 건설되고 270km의 철로가 새로 깔렸다.

당초 5월 1일로 정했던 D-데이는 1000척 이상의 상륙정을 추가로 준비하는 문제로 한 달 가량 늦어졌다.

'50분의 1 확률'의 조건을 갖춘 날로 낙점

상륙에 핵심적인 조건은 두 가지였다. ‘늦게 뜨는 달과 새벽 간조’

상륙작전 이전 해안의 후방에 먼저 투하될 3개 공수사단 1만8000명이 안전하게 낙하하기 위해서는 낙하지점에 이를 때까지는 어둡고, 낙하 시점에는 달이 떠야 했다.

인천 앞바다는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갯펄이 넓게 형성돼 상륙 시간은 만조 시기를 맞춰야 했다. 반면 넓은 모래 해변 노르망디는 썰물이어야 했다. 독일군이 해수면 아래와 해안에 설치한 방어 장벽들이 물밖으로 드러나야 피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초반부 상륙 전투 장면에는 해안에 대전차 장애물 일명 ‘체코 고슴도치’가 즐비하게 놓여 있는 것이 보인다.

독일군은 1942년부터 ‘대서양 방벽’을 구축했는데 프랑스 해안에 500만 개의 지뢰가 설치됐다. 땅에만 묻는 것이 아니라 막대기에 매달아 놓기도 했다.

이밖에 바다가 잔잔하고 바람이 바다에서 내륙으로 불어야 폭격으로 생긴 연기를 걷어내 표적을 찾기 쉽다. 그렇지만 상륙정 항해를 위해서는 바람이 초속 8m를 넘어서는 안됐다. 이런 저런 조건을 맞출 확률은 50분의 1 가량이었다.

아이젠하워 연합원정군사령관은 이런 조건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압축된 6월 5,6,7일 중 6일을 최종 낙점했다.

상륙 최적 지점은 노르웨이에서 에스파니아까지 5600여km 해안 중 칼레와 노르망디 두 곳으로 좁혀졌다.

칼레는 영국에서는 가깝지만 해안에 절벽이 많고 해변이 좁은 데다 노르망디의 셰르부르항 같은 큰 항구가 없어 제외됐다.

상륙 암호 감청하고도 무시한 독일

독일 히틀러와 롬멜 사령관은 칼레를 상륙지점으로 생각하고 이곳에 병력을 집결했다.

독일군 감청부대는 연합군이 상륙 작전을 벌일 경우 행동 개시 직전 프랑스 내부에서 활동하는 레지스탕스(저항운동가)에 무선 신호를 보낼 것이라는 내용을 감청을 통해 파악하고 있었다.

연막과 기만 작전을 위해 내보내는 많은 구절 중 폴 베를린의 시 ‘가을의 노래’ 중 앞부분 두 구절이 앞과 뒤로 나오면 상륙은 뒷부분이 나온 뒤 48시간 이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6월 1일 오후 9시 BBC 라디오 방송 뉴스가 끝나고 아나운서가 몇 가지 사연을 들려주면서 시 앞부분을 낭독했다. ‘가을날 바이올린의 긴 흐느낌’. 시의 첫 구절이었다.

독일 감청팀은 뒷부분이 나오길 기다렸다. 2일과 3일은 앞부분만 반복됐다. 드디어 후반부가 5일 오후 10시 조금 지나 나왔고 독일군은 즉각 감청했다. ‘단조로운 울적함에 마음 아파라’ 시의 두 번째 구절이었다.

이 내용을 감청한 뒤 칼레 등 북부를 지키는 15군에는 경계 경보가 내려졌으나 정작 노르망디를 지키는 7군에는 전달되지 않았다.

7군을 관할하는 롬멜 B집단군 사령관은 정보를 신뢰하지 않고 독일로 휴가를 떠났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연합군 사상자가 12만 명 가량이었으나 독일군의 ‘정보 실패’가 없었다면 피해는 더욱 늘어났을 것이다.

참고 자료 : ‘물로 씌어진 이름’ 2권(복거일·백년 동안), ‘디데이-1944년 6월 6일 세상에서 가장 긴 하루’(최필영 옮김·일조각)

[서울=뉴시스]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의 '오마하 해변' 상륙지점에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사진출처 노르망디 전투 상륙작전 기념관 홈페이지).2024.06.06. *재판매 및 DB 금지

☞공감언론 뉴시스 kjdrago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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