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 나간 軍… 작년에만 간부 9481명 떠나

고유찬 기자 2024. 6. 6.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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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년보다 24% 늘어 역대 최다
대위·중사급 중간간부가 43%
지난해 10월 제대군인 취업 박람회를 찾은 전역 예정 장병들이 채용 부스를 살펴보고 있다. /뉴스1

지난해 군을 떠난 경력 5년 이상 간부(장교, 준·부사관)가 9000명을 넘어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일선 사단급 병력(1만명) 규모 간부가 한 해 동안 군을 떠난 것이다. 특히 ‘군의 허리’라고 하는 5~10년 중간 간부(대위·중사급) 이탈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픽=이철원, 사진=플레이그라운드

국가보훈부 통계를 보면 2023년 군을 떠난 간부는 9481명이었다. 전년(7639명)보다 24.1% 늘었다. 2015~2022년 7000명대를 유지하던 숫자가 지난해 처음으로 9000명을 넘어선 것이다. 이 중 5년 이상 10년 미만 복무한 중간 간부 숫자는 지난해 4061명으로 전체의 43%나 됐다.

대위·중사급 간부들인 이들은 ‘군의 허리’다. 육군을 기준으로 대위는 일선 부대에서 중대장급 지휘관이나 대대 핵심 참모를, 중사는 소대장급 지휘자나 부중대장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30대인 이 중간 간부들은 동생뻘 병사들과 현장에서 호흡하며 야전 전투력을 책임지는 군의 중추다.

국군 전체 병력의 73%를 차지하는 육군에서 지난해 자발적으로 전역한 대위는 411명. 2019년 271명에서 1.5배가량으로 늘었다. 중사·상사 계급 자발 전역 인원도 지난해 각각 920명과 480명으로 같은 기간 2배가량으로 늘었다.

전역자들은 “문재인 정부 시기 병사 월급이 대폭 인상됐고, 병사 인권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됐다”며 “결국 간부들만 ‘갈아 넣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구시대적 조직 문화 ▲긴 업무 시간 ▲박봉 ▲낮은 사회적 처우 등도 이유로 꼽혔다.

그래픽=이철원

김모(30)씨는 지난 2월 육군 중사로 전역한 뒤 헬스 트레이너와 배달업을 하고 있다. 그는 “군 월급의 3배를 벌고 있다”며 “전역하길 잘했다”고 했다. 김씨는 “군에서 오후부터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당직을 서도 수당은 2만원에 불과한데 사고가 나면 간부로서 ‘무한 책임’을 져야 했다”며 “몸도 마음도 훨씬 편하다”고 했다. 서울 여의도의 헬스 트레이너 나모(32)씨도 육군 특수부대 부사관 출신이다. 그는 “전역한 이후 잠깐 대리운전을 뛰었는데 군대보다 훨씬 편하고 벌이도 낫더라”고 했다.

그래픽=이철원

간부들은 “밤낮없이 일하는데 월급이 턱없이 적다”고 말한다. 올해 대위 1호봉이 258만원. 군 간부들은 병력 관리와 훈련, 당직 등으로 수면 시간을 빼면 모두 근무라고 해도 무방하지만 수당은 몇 만 원 수준이다. 한 예비역 중사는 “지난 10년간 짜장면 가격은 8배가 올랐고 최저 시급은 7배가 올랐는데 중사 1호봉 월급은 고작 4배 올랐다”고 했다.

사실상 최저임금(시급 9860원)보다 못한 월급을 받는 간부들은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월급이 125만원(병장 기준)까지 오른 병사보다 못한 처우를 받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의식주를 국가가 보장하는 병사와 달리 간부들은 식비, 주거비 등을 모두 자기 주머니에서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육군 전방 부대에서 복무하고 있는 최모(28) 중위는 이러한 열악한 처우 문제로 장기 복무 지원을 포기했다. 그는 “평일 당직비 2만원, 주말 당직비 4만원을 받는데 밤샘 당직 후 휴식도 보장되지 않는다”며 “경찰·소방은 평일 5만원, 주말 10만원을 받고 이틀이나 휴식한다는데 똑같이 나라를 위해 일하는데 박탈감이 든다”고 했다.

최 중위는 군 당국이 내놓는 초급간부 주거 지원 대책의 효과를 현장에서 전혀 체감할 수 없다고 했다. 지난해 결혼한 그는 군 관사를 구하려고 했지만 대기자가 너무 많았다. 군 전세 자금 대출을 받아 신혼집을 구하려 했지만 부대장이 불허했다. ‘초급간부는 무조건 영내에서 통제받아야 한다’는 식의 상관들의 마인드에 실망했다고 한다. 그는 전역 후 철강 기업이나 의료 브랜드 회사에 지원할 생각이다.

육사 출신 박모(33) 대위도 전역을 결심했다. 그는 “육사를 나오면 최소 대령까지는 진급이 보장된다는데, 결혼도 못 하고 주거 환경도 엉망진창인데 계급장 달아봐야 뭐 하겠나”라고 했다. 미혼인 그는 수년 동안 결혼을 시도했지만 불발됐다. 여성들은 근무지를 밥 먹듯 옮기는 직업 군인인 그를 ‘하층민’ 취급했다. 한 육사 선배의 아내는 직장을 그만두고 격오지에서 남편과 함께 살다가 우울증에 걸려 자살했다고 한다.

그는 “이럴 거면 그냥 돈도 적당히 받고 생활도 편한 병사로 군 복무를 할걸 그랬다”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겠다며 사관학교에 지원한 내가 어리석었다”고 했다.

최근 수년간 코로나와 부실 급식 사태 등을 거치면서 영내 ‘병사 인권’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면서 병사와 같은 연령대인 2030 초급간부들의 업무 부담이 급증했다. 일선 중대장들이 병사 부모에게 ‘아픈 우리 애 약 먹었는지 사진 찍어서 인증해달라’ 같은 요구를 받는 일이 일상화한 군대가 됐기 때문이다.

육사 출신 김모(29) 대위는 “부대 관리가 중요하다며 사람을 소모품 취급하며 퇴근 이후와 주말에도 시도 때도 없이 명령을 내리는 상관들에게 질렸다”며 “육사 에이스들이 군을 떠나고 있다”고 했다. 육사 동기들 사이에선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말도 오르내린다고 한다. 김 대위는 “지난해 모 사단에서 근무하던 후배가 자살했고, 몇 주 전엔 동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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