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8중 잠금장치 풀렸다” 조선왕실 땅밑 ‘보물창고’ 들어가보니

2024. 6. 6.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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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개관 후 첫 수장고 언론 공개
8만8000여 점 유물 19곳 수장고 나눠 보관
포화율 160%…‘개방형 수장고’ 분관 건립 추진중
정소영 유물과학과장이 5일 제11수장고에서 조선왕조에서 사용한 궁중 현판이 보관된 수납장을 꺼내는 모습. 이정아 기자.
조선 왕실의 어보·어책·교명 등 보물이 보관된 제10수장고 전경. 이정아 기자.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근무해도 이곳은 마음대로 못 들어와요.”

국립고궁박물관의 취재 협조를 받아 5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지하에 있는 ‘수장고’(收藏庫)를 찾았다. 외부에서 오염물질이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장고에 들어가기 전에는 덧신을 신고 마스크를 착용해야만 했다. 300m에 이르는 좁은 연결통로를 따라 걸었고, 정소영 유물과학과장이 평소 굳게 닫혀있는 철문을 열자 마침내 보물창고가 펼쳐졌다. 정 과장은 “2005년 개관 이후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하는 곳”이라며 “담당자는 물론 관장조차도 카드키, 신원 확인 등 8중의 보안 절차를 거쳐야만 이곳 수장고에 들어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62년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청사)의 안보회의장소를 위한 벙커로 만들어진 뒤,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로도 개조돼 쓰였던 이 공간이 공개된 건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조선 왕실의 어보·어책·교명 등 보물이 보관된 제10수장고 전경. 이정아 기자.
제11수장고 전경. 이정아 기자.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는 조선 왕실과 대한민국 황실 유물 총 8만8530점(5월 말 기준, 국보 4건·보물 27건)이 보관돼 있다. 유물은 종이·목제·도자·어보·금속·석제 등 재질과 유형에 따라 나뉘어 수장고에 분류돼 있다. 수장고는 지하 수장고 16곳을 포함해 총 19곳이다.

정 과장은 “국립고궁박물관 개관 당시에만 해도 3만6000여 점의 유물이 보관돼 있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보다 2.5배 이상 늘어난 상태”라며 “안전하고 체계적인 보관과 관리를 위해 추가적인 공간 확보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재 수장고 포화율은 160%에 달한다.

제10수장고 수납장 위에 놓여 있는 온·습도계. 이정아 기자.

이날 취재진에게 공개된 제10수장고는 조선 왕실의 어보·어책·교명 등 628점의 보물을 보관한 공간이다. 어보는 금·은·옥 재질의 의례용 도장이다. 국왕, 왕비, 세자 등을 책봉하거나 덕을 기를 칭호를 올릴 때 사용하기 위해 제작됐다. 어책은 역사적 배경, 의미,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교명은 왕비, 왕세자 등을 책봉할 때 내리는 훈유문서(訓諭文書)다.

오동나무로 짠 4단 수납장에는 함에 담긴 어보가 놓여 있었다. 각 유물에 달린 꼬리표에는 관련 정보가 적혀 있었다. 수납장 위에 놓여진 온·습도계는 온도 20.6도, 습도 55.6%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 과장은 “금속과 목재가 보관된 제10수장고의 경우 온도는 20±4도, 습도는 50~60%가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제11수장고에 보관된 ‘현사궁’(顯思宮) 현판. 이정아 기자.
현판이 거꾸로 보관돼 있는 모습. 이정아 기자.

이어 옆에 위치한 제11수장고에는 조선왕조에서 사용한 궁중 현판 766점이 모여있었다. 어의궁을 방문한 영조가 친히 글씨를 써서 만든 ‘인묘고궁’(仁廟古宮) 현판, 생모 수빈 박씨를 기리는 사당에 걸린 ‘현사궁’(顯思宮) 현판,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사당에 걸기 위해 어필로 쓴 것으로 추정되는 ‘경모궁’(景慕宮) 현판 등을 볼 수 있었다. 특히 경모궁 현판은 테두리 일부가 사라져 훼손을 막기 위해 거꾸로 보관해 관리되는 점이 눈에 띄었다.

교육행사가 이뤄지는 열린 수장고인 제19수장고에서는 8세의 정조가 왕세손으로 책봉되면서 징표로 받은 옥인(玉印·옥으로 만든 도장), 죽책(竹冊·대쪽에 새겨 엮은 문서) 등을 만날 수 있었다. 수장고 벽면을 따라서는 종묘에서 제례를 지낼 때 쓰던 갖가지 금속류 제기가 수납장을 가득 채웠다.

어보. 이정아 기자.
어책. 이정아 기자.
교명. 이정아 기자.

언뜻 보면 유물이 질서 정연하게 보관돼 있는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과밀화 문제가 심각하다. 예컨대 제10수장고에 위치한 수납장만 해도 한 칸에 2~3점의 함이 겹겹이 배치돼 있는 식이다. 정 과장은 “안쪽에 있는 함을 꺼내기 위해서는 바깥쪽에 위치한 함을 이동시켜야만 한다”며 “포화도가 굉장히 높은 상태”라고 덧붙였다.

소장품 수가 늘면서 국립고궁박물관은 2021년부터 경기도 여주에 수장시설을 임시로 빌려 운영하고 있다. 지하 벙커로 지어진 기존 수장고는 경복궁 사적지 내에 있어 증축이나 개축이 어려운 상태다. 국립고궁박물관이 관람객과 전시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개방형 수장고 형식의 분관 건립을 추진하게 된 배경이다. 정 과장은 “사전 타당성 검토 용역 직전 단계”라고 덧붙였다.

정용재 국립고궁박물관장은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으로 개청하면서 소장 유물을 보다 적극적으로 국민들에게 알리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며 “유물이 가진 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해 기준 국립고궁박물관의 한해 관람객 수는 약 88만 명이다. 이중 외국인은 15만명이다.

정용재 국립고궁박물관장. 이정아 기자.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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