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지하 10m 왕실 ‘보물의 방’ 열렸다…정조 ‘상하반전’ 친필
조선왕실 최고의 보물들은 경복궁 땅 밑에 있었다.
박정희 군사정부가 60여년 전 지하 10여m를 파 내려가
뚫은 옛 벙커 수장고가 안식처였다. 거기서 옥과 금, 대나무로 만든 역대 조선 임금들의 어보와 어책, 영조와 정조 등 역대 임금이 정성껏 쓴 크고 작은 궁궐 현판들이 은은히 빛났다.
국립고궁박물관이 2005년 개관한 이래 19년 만에 처음 언론에 경복궁 흥례문 앞 광장과 궁역 동쪽 주차장 땅 밑에 걸쳐있는 지중 수장고를 5일 공개했다.
취재진은 지하 1층으로 내려가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400m가량의 굽거나 뻗은 통로를 걸어서 통과한 뒤 박물관 쪽이 나눠준 덧신을 신고 마스크를 낀 채 제10, 제11수장고 내부로 들어갔다. 손명희 학예관은 7~8단계에 이르는 보안 검색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는 시설이라면서 재질별로 온습도와 구역을 달리해 운영되는 수장고 내부의 현황과 유물 내역 등을 현장에서 함께 이야기해주었다.
조선왕실 역대 임금의 어보·어책·교명(보물) 628점이 들어있는 10수장고를 우선 찾았다. 20㎝ 넘는 철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입장하니 수십여개의 오동나무 진열장이 빽빽하게 놓여있는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안에는 금칠과 주칠이 되거나 생나무로 된 어보, 어책을 담은 상자들이 함의 주인공이
표시된 채 나란히 놓여있었다.
이날 관람의 핵심 눈대목은 11수장고 현판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목록에 등재된 조선왕조 궁중 현판 766점(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태목록) 등이 대표적인 수장 유물이었다.
직원이 천천히 이동식 슬라이드로 된 유물 거치대를 끌어내자 정조가 쓴 글씨로 추정하는 사도세자의 사당 현판 ‘경모궁’(1776년 추정)의 거대한 현판이 거꾸로 매달린 채 나타나 눈길을 사로잡았다. 활달한 필치의 글씨였지만 아래 테두리 틀이 떨어져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 거꾸로 수납하는 조치를 취했다는 설명이었다.
이 글씨 현판 위쪽으로 영조가 친히 쓴 어필 글씨로 인조의 잠저(임금으로 추대된 왕족이 왕이 되기 전 살던 집) 어의궁에 내걸렸던 ‘인묘고궁’ (1756년) 현판과 창경궁 내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신위를 봉안했던 사당으로 순조가 쓴 ‘현사궁(1823년)’ 현판이 소담한 모양새로 놓여있었다.
고궁박물관 지하 1층에 자리한 열린 수장고(넓게 뚫린 유리창을 통해 수납 유물의 모습과 상태 등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한 관람용 수장고)에서는 정조가 왕세손으로 책봉되면서 헌상된 어보와 대나무로 된 죽책, 선왕 영조로부터 받은 교명이 세 유물을 싸는 보자기, 사각통 등과 한갖춤으로 나왔다.
정조가 왕세손 시절 책봉을 받을 때 만든 죽책·옥인·교명 및 관련 부속 유물 (1759년)도 보관 중이었다. 할아버지인 영조가 재위 35년(1759)에 8살의 정조(1752-1800)를 왕세손으로 책봉하며 만든 것들인데, 관리하는 당시 궁중 관리들이 어보를 함에 넣을 때 잠그는 열쇠에 자신의 이름과 직위, 잠근 상황 등을 적은 종이를 붙여놓은 모습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고궁박물관 지하수장고는 역사적 내력이 복잡하다. 일제가 1925년 경복궁의 가장 큰 건물 근정전과 정문 흥례문 바로 앞을 가로막으며 세운 옛 조선총독부건물 터의 땅 밑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 이 건물을 정부종합청사(중앙청)로,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활용하면서 1980년대 중반부터 벙커를 개축한 수장고 공간이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1961년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육군소장의 군사정부가 그 이듬해 중앙청 지하를 마구 파 내려가면서 안보회의 시설로 만든 거대한 벙커 공간과 비밀 통로들이 수장고 공간의 원형이 됐다. 1995년 총독부청사 철거 뒤로는 흥례문 앞으로 펼쳐진 드넓은 광장이 생겨 고궁박물관에서 동쪽 주차장까지 이동할 수 있게 됐는데, 바로 이 넓은 이동 통로 밑에 왕실보물들의 안식처인 지하수장고가 13개나 자리 잡고 있다는 게 박물관 쪽의 설명이다.
고궁박물관 관계자는 “2005년 개관 이후 지하 수장고 16개와 본동 수장고 3개, 경기도 여주 임차수장고 1개에 국보 4건, 보물 27건을 포함한 8만8530점의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으나 격납된 유물들의 포화율이 지난 5월 현재 160%에 달하는 등 과밀화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면서 “큰 유물이 많은 왕실 유산 특성에 최적화한 수장·보존처리 공간을 조성하고 대국민 서비스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전시형 수장고 형식의 분관 건립을 추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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