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 석 자’가 이기길

한겨레21 2024. 6. 5.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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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물은 안부였는데, 지인은 부당해고 근황을 알려왔다.

정확히는 부당해고에 맞선 싸움을 시작했다는 소식.

이 소송 끝에 자신이 옳았다는 게 법으로도 증명된다면 그때는 책을 자비로 다시 찍어서라도 자기 이름 석 자를 그대로 책에 담을 거라고 했다.

지노위 게시판에서 본 이름 모를 이들이, 나와 취재로 만났던 이들이, 그리고 내 동료가 머지않은 가까운 날, 이름 석 자를 내밀며 '내가 이렇게 싸웠어'라고 말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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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지나가다 물은 안부였는데, 지인은 부당해고 근황을 알려왔다. 정확히는 부당해고에 맞선 싸움을 시작했다는 소식. 주로 노동 문제에 관한 글을 쓰는 내게 ‘부당’한 ‘해고’라는 것은 익숙한 단어였지만, 익숙하다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내 문제도 아니었다. 애매한 거리를 두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고 입사 한 달 만에 동기 대부분이 퇴사하거나 권고사직서에 서명했지만,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 노동위원회에 신고한 상태라 했다. 힘든 싸움. 이런 고루한 표현을 쓰긴 그렇지만, 충분히 골치 아프고 충분히 마음 상할 일이 펼쳐질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살던 대로 살 수 없어서

며칠 전, 서울 영등포에 있는 지방노동위원회(이하 지노위)를 다녀온 참이었다. 인터뷰 상대가 지노위에서 조정위원회를 앞두고 있었다. 그를 기다리며 게시판을 둘러보니 날마다 잡힌 심문, 심판, 조정 일정이 빼곡했다. 이름이 알려진 기업부터 사단법인이 운영하는 복지관까지, 업종도 다양하다. 다니던 직장을 상대로 골치 아픈 선택을 한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는 이야기.

내게도 충분히 골치 아팠던 적이 있다. 그 아픔에 일상이 흔들리는 것이 싫어 다른 선택을 한 날은 더 많았다. 그러니 게시판에 적힌 수많은 회사명을 보며 묻게 된다. 왜 싸우나. 당사자에게 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빤할 것임을 안다. 이대로 있을 수 없어 뭐라도 하다가 번지는 게 싸움이다. 아무래도 이렇게는 아닌 것 같아. 내 식대로 거창하게 표현하면 ‘살던 대로 살 수 없어서’쯤 되겠지만, 현실에선 그리 대단한 모습으로 나타나진 않는다. 내게 싸움이란 커트 머리이기도, 짜장면이기도 하다.

‘서비스 정신’을 앞세우며 무조건 머리를 길러 망사 머리망에 넣고 다닐 것을 요구하던 호텔에 보란 듯이 댕강 커트 머리로 자르고 출근한 호텔 여성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파업 중에 진압을 당해 유치장에 끌려온 여성들이 오들오들 떨기는커녕 ‘우리는 잘못한 게 없다’며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경찰들에게 짜장면을 시켜달라고 요구한 일을 듣는다. 그 이야기를 깔깔 웃으며 하면, 나도 깔깔 재미나게 듣는다. 그 사이로 숨겨놓은 통증 같은 건 그렇구나 한다.

7년 전 만난 이가 있다. 그 역시 해고의 부당함을 두고 다투는 중이었다. 그의 직업은 ‘세상 만만한’ 여자 일이었고, 잘릴 때도 만만해서 잘렸다. 어렵게 싸움을 시작했으나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지속할 순 없었다. 최근 그의 이야기를 책에 담아야 할 일이 있어 허락을 구할 겸 연락을 했다. 안부를 묻자 한바탕 육아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도 법정에서 부당해고 여부를 가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의 싸움은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러기만을 기다리겠다”

그는 책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 것은 허락했지만 가명을 사용해달라고 했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건 자녀 때문이었다. 싸움이 구설이 되고, 구설이 해가 될지도 모르는 세상이니까. 무거워지는 것이 싫어, 나는 누군가 알게 될 정도로 많이 팔리는 책이 아니라고 농담했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그는 미안했던지 소송 중인 판결 이야기를 꺼냈다. 이 소송 끝에 자신이 옳았다는 게 법으로도 증명된다면 그때는 책을 자비로 다시 찍어서라도 자기 이름 석 자를 그대로 책에 담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러기만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지노위 게시판에서 본 이름 모를 이들이, 나와 취재로 만났던 이들이, 그리고 내 동료가 머지않은 가까운 날, 이름 석 자를 내밀며 ‘내가 이렇게 싸웠어’라고 말할 수 있길 바란다.

희정 기록노동자·<뒷자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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