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대통령 때 아웅산테러 현장 29년만에 참배...표지석 하나 없었다
미얀마에 아웅산 테러 순국사절 추모비 건립, 오늘로 10주년
김태효, MB 방문 한 달전 극비 방문해 특별 경호 조치 협의
“테러 현장에 추모비 세우자” 본사 제안, 2014년 결실 맺어
[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비사를 전해드립니다.]
오늘로부터 10년 전인 2014년 6월 6일 현충일, 미얀마 양곤에서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아웅산 테러 유가족 34명 등이 참석한 가운데 ‘아웅산 묘역 대한민국 순국사절 추모비’ 제막식이 개최됐습니다. 1983년 북한에 의해 미얀마에서 테러가 발생한 지 31년만에 현장에 추모비가 건립된 겁니다.
아웅산 순국사절 추모비 건립 계기는 2012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미얀마 국빈 방문이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미얀마 정부의 초청으로 5월 14일 수도 네피도를 방문, 테인 세인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15일엔 양곤으로 이동, 미얀마 민주화를 상징하는 아웅산 수치 여사를 면담했습니다. 이어서 언론에 알리지 않은 채 29년 전 북한의 테러가 발생한 아웅산 국립묘지를 전격 방문했습니다. 이 대통령의 현장 방문에는 김성환 외교부 장관, 홍석우 지경부 장관, 천영우 외교안보수석, 김태효 대외전략기획관 등 소수의 수행원만 동행했습니다.
아웅산 묘지는 미얀마인들에게는 성소(聖所) 같은 곳입니다. 미얀마의 독립 영웅이자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인 아웅산과 그의 동료를 추모하는 빨간색의 추모탑과 경찰 경호동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미얀마는 북한의 폭탄 테러가 발생한 건물을 모두 철거했으며 지금도 개방돼 있지 않습니다.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제한적으로 추모객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테러 현장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29년 만에 처음 방문한 이 대통령은 곤혹스러워했습니다. 이곳엔 북한의 테러와 관련된 흔적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무런 표지석도 없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결국 아웅산을 추모하는 조형물 앞에 ‘17대 대한민국 대통령’ 이라고 쓰인 조화 앞에서 묵념해야 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미얀마 새 정부 출범 이후 첫 국빈으로 방문했기에 아웅산 묘지를 찾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북한의 테러에 대해선 “20세기 역사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곳”이라며 “가족들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역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청와대는 이 대통령이 아웅산 묘지를 방문한 후에야 이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언론에는 네피도에서 양곤으로 이동하는 기내에서 아웅산 묘지 방문을 최종 결심했다고 브리핑했습니다. 청와대가 이렇게 신중하게 나온 배경에는 이 대통령의 아웅산 묘지 방문이 사전에 공개되면 북한의 또 다른 테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정부 고위 관계자는 “아웅산 묘지 방문의 특수성 때문에 비록 그 가능성이 작더라도 북한의 테러 가능성에 대해 대비해야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북한의 테러에 대비, 자동소총 무장한 암살대응팀(CAT)이 경호
미얀마와 북한은 1983년 아웅산 테러 직후 단교했습니다. 그러다가 2007년 4월 다시 관계를 정상화, 외교관계를 재개한 상태였습니다. 2007년 김영일 북한 외무성 부상이 이끄는 대표단이 미얀마를 방문, 복교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미얀마도 같은 해 7월 외무 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북한에 보내며 군사 교류를 강화, 우리로서는 북한의 움직임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던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이 물밑에서 움직였습니다. 2012년 4월 주미얀마 한국대사관은 비밀 지시를 받습니다. 김태효 기획관이 다음 달로 예정된 이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서 방문하니, 미얀마 정부 고위 관계자를 만날 수 있도록 접촉하라는 지시였습니다. 김 기획관은 당시 외교부는 물론 청와대 비서실, 경호실에 알리지 않은 채 혼자 방문했습니다. 그는 이틀간 머물면서 미얀마의 고위 관계자와 만나 이 대통령 국빈 방문 시 경호에 빈틈없이 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특별히 북측의 동향에 신경을 써 달라고 했습니다.
사실상 이 대통령의 특사로 방문한 김 기획관의 요청에 따라 미얀마는 최고 수준의 경계 태세에 돌입했습니다. 이 대통령이 수도인 네피도와 양곤에 머물 때 호텔은 물론 공항, 도로변에 장갑차와 수 천명의 무장 요원들을 배치했습니다. 당시 경호처는 미얀마 측의 도움을 받아 대통령이 머무는 호텔 옆 연못을 잠수사를 동원해 수색하기도 했습니다.
청와대는 대통령이 방문하는 네피도와 양곤에 대통령 전용 방탄 차량과 경호 차량을 각각 별도로 수송했습니다. 이례적으로 휴대용 권총을 소지한 경호원들뿐만 아니라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암살대응팀(CAT)이 수행하게 했습니다. 또 미국 정부에도 협조를 요청, 미 정보기관으로부터 시시각각 북한 측의 움직임을 모니터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전직 관료는 “이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을 위해 역대 최대 수준의 경호팀과 장비가 동원됐다”고 말했습니다.
김태효 기획관은 이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는 1983년 아웅산 테러 이후 처음으로 미얀마를 방문함에 따라 반드시 현장을 방문, 추모행사를 가져야 한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대통령이 아웅산 묘지에서 테러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경호처는 대통령이 방문할 정도의 경호 준비가 안 돼 있다며 반대 입장을 피력했습니다. 대의(大義)도 좋지만, 대통령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없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이같은 입장이 충돌하는 가운데, 이 대통령이 양곤으로 출발하기 전에 “아웅산 묘지로 가자”고 결정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암살대응팀의 경호 속에 아웅산 테러 폭발 현장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조선일보 편집국 회의 “어떻게 테러 현장에 추모비 하나 없느냐”
이 대통령이 아웅산 묘지를 방문, 추모 행사를 가진 것은 큰 뉴스였습니다. 조선일보는 이 대통령의 현장 방문 기사가 나오자 이를 1면 톱 기사로 다루기로 했습니다. 이날 저녁 7시 조선일보 편집국 회의에서 막 편집된 초판(初版) 신문을 바라보던 당시 양상훈 조선일보 편집국장(현 조선일보 주필)이 혀를 찼습니다. “북한의 아웅산 테러로 많은 사람이 희생됐는데 어떻게 현장에 추모 표지석 하나 없을 수 있느냐.” 양 국장은 당시 정치부 외교안보팀장이던 저에게 “아웅산 묘역 현장에 추모비를 세우는 방안을 강구해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이후 조선일보는 내부 논의에서 아웅산 테러가 2013년 10월이면 30주년이 되는 것에 착안, 정부에 ‘아웅산 테러 순국사절 추모비’를 만들자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미얀마에 테인 세인 신(新) 정부가 들어선 것을 계기로 한·미얀마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는 상황도 현지에 추모비를 세울 좋은 기회라고 봤습니다.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해서는 늘 불편한 문제로 남아 있던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아웅산 묘지를 방문했던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도 테러 현장에 아무런 추모비 하나 없는 것을 씁쓸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조선일보의 제안이 의미가 있다고 보고 주미얀마 한국대사관에 전문을 보내 이를 양국 간 주요의제로 논의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당시 주미얀마 대사관의 김해용 대사와 윤강현 공사참사관은 미얀마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을 수차례에 걸쳐 만나 “한·미얀마 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열자”며 추모비 건립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어서 이명박 대통령이 2012년 10월 테인 세인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청했을 때 김성환 외교부 장관은 운나 마웅 린 외교부 장관에게 아웅산 국립묘지에 ‘희생자 추모비’를 건립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 동의를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계획했던 만큼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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