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중환의 진화의 창]임신은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다

기자 2024. 6. 5.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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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그거 헛구역질 좀 하면서 아기를 열 달간 배 속에 품다가 쓱 꺼내는 거잖아.” 혹시나 이렇게 생각하셨다면, 큰 착각이다. 본래 임신은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다. 젊고 건강하던 여성도 임신을 하면 두통, 소화불량, 변비, 허리 통증, 요실금, 가려움, 입덧, 부기, 숨 차기 등에 시달린다. 임신부에게 기가 막힐 노릇은 아파서 병원에 가도 의사는 “정상적인 증상입니다”라는 말만 들려준다는 사실이다. 물론 임신중독증이나 임신성 당뇨 같은 질병에 걸린 임신부는 더 큰 피해를 본다. 사실, 근대 이전에 임신 중에 혹은 낳다가 죽는 일은 여성에게 가장 흔한 사망 요인 중의 하나였다.

왜 임신은 그토록 말썽을 일으킬까? 자연 선택의 산물인 우리 몸은 숨을 쉬거나, 피를 구석구석 돌리거나, 노폐물을 내보내는 등의 다른 임무는 한평생에 걸쳐 거의 완벽하게 완수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런데 왜 자연 선택은 고작 280일 동안 진행되는 임신을 얼기설기 대충 만들어 놓는 바람에 수많은 ‘정상적인’ 임신부가 내내 비명을 질러대게 할까? 아기를 쑥쑥 낳도록 자연 선택이 응당 더 신경을 썼어야 하지 않나?

임신과 다른 신체 활동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임부의 심장이나 콩팥을 이루는 세포들은 모두 유전적으로 동일하다. 임부의 자식 수를 늘리고자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한다. 자궁 안에서는 다르다. 엄마 세포에 있는 유전자와 태아 세포에 있는 유전자가 추구하는 진화적 이해관계는 서로 엇갈린다. 엄마는 배 속의 태아나 장차 낳을 아기나 다 같은 친자식이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자식들을 공평하게 대하도록 선택된다. 반면에 태아는 자기 자신을 미래의 동생보다 더 소중히 챙기도록 선택된다. 갈등이 터진다.

<다윈에서 데리다까지>를 쓴 진화생물학자 데이비드 헤이그에 따르면, 엉망진창으로 치닫는 호르몬 의사소통은 임부와 태아의 진화적 갈등을 잘 보여준다. 막 수정된 배아를 생각해 보자. 배아는 싸다. 갑자기 끔찍한 망언을 내뱉는 게 아니라, 진화의 관점에서 비용만 따지면 저렴하다는 뜻이다. 선천적 이상이 있는 태아를 굳이 낳아서 오래 키우기보다는, 문제가 포착되면 일찌감치 투자를 중단하고 다음달 배란을 기다리는 편이 임부는 진화적으로 더 이득이다(다시 한번, 낙태를 도덕적으로 옹호하는 말이 아니다!). 즉, 착상 초기에 임부는 까다롭고 엄격한 시험평가관이다. 배아의 자질을 꼼꼼히 평가해서 불합격한 배아를 월경 때 자궁 내막과 함께 밖으로 흘려보낸다. 연구에 따르면 배아 중에 약 70%는 임부도 모르는 사이에 수정 후에 한 달 내로 제거된다.

수험생인 태아의 자질을 평가하는 항목은 태아가 만드는 호르몬의 양이다. 임신 테스트키에 빨간 줄로 표시되는 ‘인간 융모성 생식선 자극 호르몬(hCG)’을 많이 만들면 합격이다. 언뜻 생각하면 평가관(임부)과 수험생(태아) 사이에 갈등이 없을 듯하다. 합격의 기준선이 있다. 우수한 태아는 hCG를 그보다 더 만들어 붙는다. 열등한 태아는 hCG를 그만큼 못 만들어 떨어진다. 뭐가 문제람?

문제는, 열등한 태아는 hCG의 양을 어떻게든 늘리는 데만 전력투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hCG의 양과 태아의 자질 사이의 상관관계는 점점 약해진다. 마치 초단기 속성 학원에 다녀 시험점수는 끌어올렸지만, 실력 향상은 물음표인 수험생과 같다. 결국 임부는 임신을 지속시킬지 여부를 판가름하는 hCG 기준선을 올린다. 이에 맞서 태아는 hCG를 더 많이 만든다.

태아는 임부를 끈덕지게 설득하고, 임부는 태아를 쌀쌀맞게 외면하는 진화적 군비 경쟁은 점입가경에 빠져든다. 실제로 조그마한 태아는 하루에 약 1g이라는 엄청난 양의 hCG를 임부의 혈액에 분비한다. 생리학자들을 따르면 이 양은 “비장할 정도로 많다”. 그러나 이 호르몬이 임부에게 끼치는 효과는 비교적 미미하다. hCG는 대량 발송되지만 수신자에게 영향은 거의 주지 않는 스팸메일인 셈이다.

태아가 효과도 미미한 hCG 호르몬을 어마어마하게 발송한다는 사실은 엄마와 태아 사이에 협력뿐만 아니라 갈등도 있음을 입증하는 증거다. 진정 협력적인 사이라면, 작은 목소리로 낮게 말하면 된다. 한쪽은 고래고래 언성을 높이고 다른 쪽은 애써 무시하는 모습은 다툼과 불화를 뜻한다.

임신은 원래 임부와 태아가 얽히고 부딪치는 격전장임을 이해한다면, 아기를 뱄을 때 찾아오는 고통을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지하철 임신부 배려석을 왜 항상 비워 놓아야 하는지 이제 아셨으리라.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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