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듯 다른, 1976년과 2024년 ‘영일만 석유’ [권태호 칼럼]
국민은 ‘개돼지’가 아니다. 지금은 1976년이 아니다.
권태호
초등학교 때였다. 어느 날,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께 들었다. “우리도 산유국이 된다”며 다들 들떴다. 1976년 1월15일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에서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48년 전 아득한 옛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 신문을 들춰봤다. 8개면뿐인데, 4개면이 ‘석유’ 뉴스다. 1면을 덮은 기자회견 스트레이트, 회견문 전문, 일문일답, 해설 박스, 회견장 스케치, 탐사 과정, 국내 석유 탐사 역사, 주식시장 폭등, 전문가 분석, 관계자 인터뷰, 거리 풍경, 포항 현지 반응. 당시 풍문으로 떠돌던 ‘석유’ 질문은 기자들이 가장 궁금해했으나, 청와대는 ‘밝힐 시기가 아니다’라며 예상 질문에서 뺐다. 그런데 예정된 질문을 다 소화한 뒤, 박정희 대통령이 추가 질문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석유’ 답변이 나왔다. 대통령 회견만으로도 비상이었을 텐데, 말미에 갑자기 ‘석유가 나왔다’는 보도로 1~2시간 만에 지면 절반을 다 바꿨을 당시 석간신문(동아·중앙·경향) 편집국의 혼란, 고함, 전화 소리 등 야단법석이 그려진다. 기사는 장밋빛 일색이다. ‘거리―얼싸안고 만세, 가정―기쁨의 환성, 관가―사기 되살아나, 운수업계―일대 경사, 포항―부둥켜안고 춤도’, ‘택시기사들 “합승·바가지 요금도 사라질 것”’. 사설, 만평, 4컷 만화도 온통 ‘석유 낭보’다. 윤 대통령은 그때 고등학생이었으니, 또렷이 기억할 것이다. 윤 대통령은 기억력 하나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때를 그리워했던 걸까.
많은 사람이 이번 ‘영일만 석유 발표’를 1976년 그때와 연결 짓곤 한다. 그런데 그때와도 많이 다르다. 1976년엔 비록 나중에 경유로 밝혀졌지만, 어쨌든 지하 1500m에서 퍼올려진(퍼올려졌다고 생각한) 실제 석유를 가져다놓고 대통령과 비서관들이 함께 감격스레 냄새를 맡아 보는 등 실물을 확인한 다음이었다. 2024년엔 바닷속 땅 밑에 주변 지질과는 다른 물질이 추정되는데, 석유나 가스일 가능성이 높다는 ‘물리 탐사’ 단계 수준에서 공개했다.
1976년엔 12월6일 보고받은 뒤에도 공개하지 않다가, 한달 뒤 기자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공개했다. 이번엔 일요일 장관의 보고를 받고, 다음날 대통령이 국정브리핑을 열어 직접 발표했다.
1976년 박 대통령은 “경제성이 있느냐를 과학적으로 탐사해야 할 것이다. 외국 기술자들은 매우 유망하다고 하지만 기다려보아야 할 것이다. 매장량을 알려면 시추해봐야 한다. 국민이 좋아하고 흥분하는 심정은 이해하나 직접 파 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면 하느님이 좋은 선물을 주실지도 모른다. 참고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차분하게 지켜봐 달라” 했지만, 윤 대통령이 가장 안 차분했다. “140억배럴 석유와 가스”, “동해 가스전 300배, 천연가스는 29년, 석유는 4년 넘게 쓸 수 있는 양”이라 했고, 배석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삼성전자 시총 5배”라고 추임새를 넣었다. 1976년에도 매장량 분석이 있었다. ‘363억배럴, 53년 사용’이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직접 말하지 않았다. 언론이 정부 자료 받아 그렇게 쓰게끔 했다. 두 대통령을 비교하니, 프로와 아마추어다.
궁금하다. 산업부 장관이 보고하니, ‘내일 국정브리핑하자’는 말을 누가 꺼냈을까. ‘대통령이 직접 발표한다’ 했을 때, 참모들은 뭐라 했을까. 무엇보다 대통령이 발표하면, 국민들이 ‘우리 대통령 최고’라며 박수 치리라 믿었던 걸까. 윤 대통령에 대해선 능력과 정직, 양쪽 모두에 국민의 신뢰가 없다. 지지율 21% 대통령이 이런 발표를 하면, 오히려 의구심만 키운다. 차라리 관련 전문가가 “차분하게” 설명하는 게 더 도움이 됐을 것이다. 정답을 말하자면, 현 수준에선 ‘산업부 장관 브리핑’도 아닌 ‘산업부 보도자료’가 적합하다. 관련 주식이 출렁이면,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라고 기대 수준을 낮춰 선의의 피해자가 없도록 하는 게 당국의 역할이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안 건너는 게 공무원인데, 이번엔 왜 ‘석유 나올지도 모른다’며 요행을 바라고 있을까. 마치 로또 앞자리 두개 맞았다고 일가친척에게 전화해 “로또 맞으면 절반 줄게, 우리 이제 고생 끝났어”라며 흥분하는 모양새다.
지면으로 전해지는 1976년 사람들은 순박하다. 지금은 정보의 유통이 번개처럼 빠르고, 사람들은 눈부시게 똑똑하다. 대통령 발표가 나오자마자, 해당 지질탐사 컨설팅 회사 검색하고, 구글 지도로 주소지 찾아가 사진을 띄운다. 천공 유튜브 채널 뒤져 “우리도 산유국 된다”는 발언을 찾아낸다. 그리고 이 발표를 대통령이 왜 했는지 이유를 분석한다. 누군가 정보 미리 얻어 주식시장에 개입한 건 아닌지 의심한다.
국민은 ‘개돼지’가 아니다. 지금은 1976년이 아니다.
논설위원실장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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