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대신 바늘을 휘두른 여성들···‘규방공예’ 편견 깨고 ‘예술’이 된 자수
‘규방 공예’로 폄하되던 19~20세기 자수
예술 장르로 재조명
인물부터 추상까지 주제 다양
나혜석 조카 나사균 작품부터
‘전위 작가’ 송정인 작품까지
자수 그대로도 충분했고, 자수 이상으로도 충분했다.
서울 중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은 그동안 ‘규방 공예’로 여겨지며 주류 미술사의 관심 밖에 있었던 자수를 하나의 예술 장르로서 호명하고, 재조명하는 전시다. 자수라는 장르에 덧씌워진 편견과 무관심을 겉어내는 동시에,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자수 작가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전시이기도 하다. 나혜석의 조카 나사균, ‘전위자수’ 작가로 불린 송정인 등이 이번 전시를 통해 발굴·재조명된다. 전시명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처럼 자수 작가들은 자수라는 장르의 경계를 확장하고 넘어서며 독자적인 예술 세계로 성큼 나아갔다. 붓 대신 바늘을 휘두른 여성들의 자수는 섬세하고 아름다워 그 자체로도 경탄을 불러일으키지만, 현대 미술의 흐름에 발맞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추구한 작가들은 ‘자수’라는 장르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문화유산이나 전통 자수에 초점을 맞춘 전시들은 있었지만 근현대 자수를 종합적으로 조망하는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그동안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작가와 양식, 매체를 재조명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처음으로 한국 근현대 자수의 흐름을 조망하는 전시를 개최해 전통공예, 규방공예로만 인식되던 한국 자수의 미학과 역사성을 확장하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나혜석 조카 나사균 작품부터 여학생들 ‘집단창작’ 대작까지
1전시실에선 19세기말 제작된 전통 자수를 볼 수 있다. 활옷, 침구, 노리개 등 일상용품부터 혼례 등 잔치에 감상을 목적으로 제작된 대형 자수 병풍까지, 궁중에서 궁녀들이 수놓은 궁수와 민간에서 제작한 자유분방한 민수까지 다채로운 수의 향연을 볼 수 있다.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꽃과 새를 그려넣은 화조영모도 등이 10폭의 너른 병풍에 한땀한땀 수놓아졌다. 198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출품됐던 궁에서 제작한 보료는 박쥐, 구름, 꽃을 섬세하면서도 과하지 않게 수놓아 고급스러운 궁수의 면모를 보여준다. 자수 제작은 주로 여성들이 했지만, 안주수라는 남성 자수장인 집단이 만든 작품들도 다수 선보인다. 평안도 안주 지역의 남성 자수장인들이 집단 제작한 병풍은 왕실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서민들의 집 한 채 가격에 맞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2전시실에선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자수과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가정에서 여성들 사이에 전수되던 자수는 20세기 초 ‘수예’로서 공교육의 영역으로 들어가 여성교육의 핵심으로 부각됐다. 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인 나혜석, 박래현, 천경자 등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전시는 동시대 미술의 흐름 속에 자수를 재배치한다. 나혜석의 조카였던 나사균의 작품이 눈에 띈다. 나사균(1913~2003)의 ‘죽계’는 닭의 볏의 입체감과 깃털의 부드러운 흩날림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대나무의 광택과 입체감을 생생하게 수놓았다. 나사균은 결혼 후 작품활동을 중단해 남긴 작품 수는 많지 않다.
천재적인 개인의 작품만이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1930~40년대 여학교 학생들이 집단 제작한 자수들은 이런 근대적 예술관념을 깨버린다. 숙명여자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이 3년에 걸쳐 공동 제작한 ‘등꽃 아래 공작’(1938)은 가로 3m41㎝가 넘는 대작으로 공작의 화려한 깃털을 화폭 전체에 넓게 펼쳐놓았다. 공작의 화려한 깃털의 위세와 흰 등나무꽃의 잔잔한 아름다움이 어우러져 화려함과 섬세함을 극대화해 보여준다. 경북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공동제작한 ‘해금강’(1931)은 해금강의 절경을 부드러운 톤의 색상으로 수놓았다. 수평으로 길게 뻗은 풍경의 배경까지 모두 자수로 수놓아 실의 결과 질감이 잘 느껴진다.
이렇게 다양한 자수···엥포르멜, 기하학적 추상까지
3전시실은 벽난로를 쬐며 책을 읽는 여성의 모습을 수놓은 김혜경(1928~2006)의 ‘정야’(1949)로 시작한다. 이화여자대학교 자수과 출신으로 동대학에서 교수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기도 한 김혜경은 인물화로 유명한 이인승의 그림을 밑그림으로 ‘정야’를 완성했다. 벽난로에서 주위로 퍼져 나가는 난로의 온기까지 느껴지는 작품이다.
해방 이후 자수는 이화여자대학교 자수과를 중심으로 풍요로운 시절을 맞이했다. 자수과 출신 작가들을 중심으로 추상미술이 대세를 이루던 당대의 흐름을 반영한 다채로운 자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송정인(1937~)은 추상회화인 엥포르멜, 기하학적 추상 작품을 자수로 남겼다. 전통적인 재료인 비단 대신 철망, 마대 등을 바탕으로 삼거나 밀짚, 그물, 노끈, 쇠 등 낯선 재료와 파격적 기법을 사용했다. 박을복과 이신자는 1950~60년대 중반 큐비즘(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였다. 박혜성 학예연구사는 “순수미술의 새로운 비전을 공유함으로써 순수미술과 동등한 자격을 인정받고자 하는 자수 작가들의 열망을 읽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송정인은 당시 누구보다 주목할 만한 활동을 했지만 1992년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미술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자수가 “재료와 시간을 낭비”하는, 현대화를 위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며 퇴조의 길을 걸은 것과 무관치 않다.
육아·가사로 지속적 활동 어렵기도···경계를 넘나드는 바늘과 실처럼 예술을 하다
근현대 자수는 다채롭고 풍요로웠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결혼 후 가사·육아를 전담하는 등을 이유로 지속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 3전시실 마지막에 걸린 이장봉(1917~2016)의 ‘길’과 ‘파도’(1995) 는 그래서 오랫동안 눈길을 붙잡는다. 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인 이장봉은 결혼 후 육아·가사를 전담하다 뒤늦게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파도’에서 푸른 원피스를 입은 여인은 가파른 암석 위에서 거친 바다를 바라본다. 19세기 낭만주의 화가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속의 방랑자’를 차용한 작품이다. 인생의 말년에 딸·아내·엄마로서, 자수 작가로서의 자신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듯한 여성의 덤덤하고도 고독한 뒷모습을 바라보면 먹먹한 감동이 느껴진다.
여성들에게 자수는 경계를 잇고 이면을 자유롭게 오가는 실과 바늘과도 같았다. 박혜성 학예연구사는 “20세기 한국자수의 아름다운 실의 향연 뒷면에는 서양/동양, 남성/여성, 근대/전통, 순수예술/공예 등 무수한 길항 관계가 존재한다”며 “바늘과 실은 바탕천의 표면을 뚫고 이면을 접촉하곤 다시 표면으로 돌아온다. 이분법적 경계에 의문을 던지듯 경계를 넘나 든다”고 말했다. 8월4일까지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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