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의 직업의식 [똑똑! 한국사회]
이승미 |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반도체물리학 박사)
사흘 전이었다. “어머님, 지금 산소포화도가 94로 정상 범위에서 벗어났고 더 이상 오르질 않습니다. 오늘 밤에 응급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니, 응급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대학병원으로 옮기셔야겠습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홉살 막내딸은 양쪽 콧구멍에 산소 공급을 위한 호흡줄을 꽂은 상태였다. 아침에 동네병원에서 폐렴 진단을 받고 대형 소아청소년과를 찾아가 간신히 입원한 병원이었다. 그날만 해도 세번째로 진료받은 그 병원에서 드디어 입원 수속을 마쳤건만 또 다른 병원으로 가야 한다니.
담당 의사가 왜 얼른 상급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하는 중에도 기계가 보여주는 두 자리 숫자는 착실히도 떨어졌다. 호흡줄을 빼면 바로 숨을 못 쉬는 위급 상황은 아니라지만 몇 시간 후에는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담당의가 이야기한 ‘만일의 사태’라는 표현에, 침상을 확보하지 못한 환자가 병원을 찾아 전전하다가 사망하고 말았다던 최근 신문 기사가 머릿속에 떠오르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불안해하는 내가 가여웠는지 의사는 진료 자료와 진료 의뢰서를 제출하면 대학병원에 침상을 얻을 수 있을 거라며 나를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달리는 차 뒷좌석에서 아이는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전날 밤 기침이 자꾸 나온다며 막내가 불평할 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오늘 이렇게 절박한 마음으로 응급실로 달려가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일 아침에 병원 가자”라면서도 아이 진료 때문에 출근을 미루고 아침 그룹 회의도 불참한다고 보고할 생각을 하니 한숨부터 나왔더랬다. 고등학생부터 초등학생까지 네 아이와 함께 산다는 건, 고요한 아침이 없다는 뜻이다. 아침마다 넷 중에 누군가는 아프고, 누군가는 이런저런 이유로 학교 가기 싫고, 누군가는 무언가를 찾는다며 헤집고 다니고, 누군가는 오늘까지 내야 하는 서류나 준비물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아침에야 말한다. 아침잠 많던 내가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만든 아침밥이건만, 아이들은 늦었다며 혹은 좋아하는 반찬이 아니라며 한 숟갈도 안 뜨고 나가기 일쑤다. 엄마가 되기 전까지의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전생처럼 희미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리라. 육아와 직장을 병행하는 모든 부모의 모습이리라.
어지러워하는 막내 손을 잡고 부축하며 걸어 들어간 대학병원 응급실에서는 천만다행으로 오래 기다리지 않고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또다시 이어지는 여러 검사와 입원 수속을 거친 후에야 막내는 몇 시간 전과 마찬가지로 콧구멍에 호흡줄을 꽂고 병상에 누웠다. 산소포화도 수치가 80대까지 떨어지자 더 두꺼운 가스관을 가진 육중한 장비가 도입되었고, 수치가 오른 후에야 막내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비로소 안심되었다. 산소포화도가 낮아지거나 가스관 유량이 부족하면 시끄럽게 알람이 울려 댔기 때문에 막내는 돌아눕지도 못한 채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지냈다. 가스관이 꼬이거나 겹치지 않게 계속 신경 쓰고 시간 맞춰 약을 먹이는 건 내 몫이었다. 산소포화도 95%는 우리가 반드시 달성해야 할 지상 과제였다.
밤낮으로 투약과 치료가 지속되던 입원 삼일째에서야 드디어 산소포화도는 정상 범위를 유지했다. 병실에 적응한 건지 폐렴이 나아가서인지 막내딸의 안색도 훨씬 편안해 보였다. 한시름 덜고 나니 미뤄뒀던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산소포화도 측정 장비는 언제 교정받았으며 불확도는 얼마일까?’ 모든 측정에는 불확도가 따르기에 측정 결과에는 측정값과 불확도를 함께 표기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측정 불확도는 측정값의 타당성에 대한 의심의 정도이다. 측정 기기도 정기적으로 교정을 받아야만 기기가 보여주는 수치를 믿을 수가 있다. 며칠간의 인생 과제였던 산소포화도 95라는 수치에 관해 비로소 의심이 든 것이다. 아이가 나아지자마자 이런 생각부터 들다니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한 존재가 아닌가. 아니, 그저 투철한 직업의식이라 부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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