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성금으로 날아오른 팬텀…55년간 영공 완벽히 지켜"
1969년 도입 당시 인수조종사…팬텀 3000시간 몬 '공군의 전설'
◆ 69주년 현충일 ◆
1969년 8월 29일 대구 공군기지.
커다란 태극기를 그려 넣은 F-4D 팬텀기 6대가 박정희 대통령이 서 있는 사열대 앞을 저공 비행한 뒤 활주로에 착륙했다. 한국이 미국과 영국, 이란에 이어 당대 최첨단 전투기였던 팬텀기 보유국 대열에 합류하며 동아시아 최강 공군의 날개를 처음 펴는 순간이었다.
당시 군은 팬텀기를 무사히 도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선발한 조종사 6명을 미국에 파견했다. 이들은 고강도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공군의 '보물'인 팬텀기를 직접 몰고 공중 급유까지 받으며 이틀에 걸쳐 태평양을 횡단한 끝에 고국에 도착했다.
이때 팬텀기 '2번기'를 조종했던 이재우 동국대 석좌교수(90·예비역 공군 소장)와 지난달 20일 서울 동국대 연구실에서 마주 앉았다. 노병(老兵)은 반백 년도 더 지난 그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며 감회에 젖었다.
그는 팬텀기 최초 인수 요원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공군의 전설이자 '아흔 살의 현역'이었다.
이 교수는 "대구기지로 마중 나온 박 대통령이 우리 조종사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어깨를 두드려주며 기뻐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팬텀기(F-4E) 퇴역을 맞는 소감을 묻자 "어려운 형편에도 방위 성금을 쾌척해 공군에 최신예 전투기를 사주셨던 국민께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라며 "국민의 정성에 힘입어 팬텀기가 지난 55년간 영공방어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고 답했다.
이 교수 말처럼 극빈 국가였던 한국이 당시 최첨단 전투기였던 팬텀기를 세계에서 네 번째로 도입한 것은 국민과 정부, 군이 함께 이뤄낸 성과였다.
팬텀기 도입 직전인 1968년의 한반도 정세는 북한 특수요원들의 청와대 기습 미수 사건(1·21 사태)과 푸에블로호 납북 사건 등으로 폭발 직전이었다.
미국은 한국에 1억달러 규모 군사 원조를 제공했고, 한국 정부와 군 당국은 이 재원으로 팬텀기를 도입해 한반도의 제공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그런데 정작 미국은 여러 이유를 들면서 한국에 팬텀기를 내주기를 꺼렸다. 이 교수는 "미국은 '팬텀이 전자장비가 많이 탑재된 최신예 기종이라 한국 공군은 가져가도 운용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장지량 공군참모총장이 '그래도 팬텀기를 도입해야 한다'며 박 대통령에게 끈질기게 건의했다고 들었다"면서 "박 대통령도 미국 사람들에게 '팬텀기를 팔지 않겠다면 청와대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라'며 고집해 결국 뜻을 관철했다"고 밝혔다.
장 총장은 1966년부터 2년간 공군참모총장으로 재직하며 팬텀기 도입 작업을 추진해 한국 공군 현대화의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1967년 미국 출장 당시 직접 팬텀기에 탑승한 뒤 성능에 대한 확신을 갖고 박 대통령에게 경쟁 기종 대신 팬텀기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건의했다.우여곡절 끝에 팬텀기 도입이 결정되자 공군의 에이스 조종사 6명이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았다. 당시 중령이었던 이 교수는 대위였던 미군 교관을 괴롭히며 팬텀기의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그는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에서 편대장을 맡을 정도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조종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공군 에이스로서의 자존심과 계급장을 잠시 내려놓고 '전투적'으로 배우고 익혔다.
이후 이 교수는 팬텀기와 동고동락하며 신명 나게 조국 영공을 지켰다. 총 비행시간 6000시간 중 팬텀기 조종간을 잡은 시간은 3000시간에 이르렀다. 긴급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조종복을 입은 채 활주로에 야전침대를 깔고 팬텀기 옆에서 잠든 날도 부지기수였다. 그는 팬텀기 대대장과 비행단장을 지내며 '팬텀 공군' 건설에 앞장섰다.
이 교수는 "한국이 팬텀기를 도입한 이후 북한은 이제껏 단 한 차례도 공중 도발을 감행하지 못했다"면서 '애기(愛機)'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북한군도 자신들의 주력 기종인 미그-21이 '게임체인저'였던 팬텀기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게 이 교수 설명이다. 그는 "압도적 우위를 갖춘 팬텀이 딱 버티고 있어 북한이 도발할 생각을 못 했다"며 "팬텀은 그야말로 본전을 제대로 뽑은 전투기"라고 강조했다.
팬텀기와 함께 하늘에서 전투 직전의 일촉즉발 상황을 맞기도 했다. 이 교수는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일어나자 '북한이 추가 도발하면 곧장 평양으로 날아가 주석궁을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격했다. 그는 "폭탄을 잔뜩 매단 팬텀기 12대를 이끌고 하늘을 선회하는데 머릿속에는 '북한으로 들어가야 한다면 함께 출격한 12대 모두를 무사히 데리고 나와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고 떠올렸다.
그는 장성 진급 이후 한미연합군사령부 정보참모부장과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를 역임했고, 공군군수사령관을 지낸 후 소장으로 예편했다.
전역 이후 군에서 익혔던 전자장비와 컴퓨터 관련 지식 그리고 연합사에서 갈고닦은 정보 수집·보안 노하우를 인정받아 한국전산원 초대 부원장에 임명됐다. 이어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원장으로 일하며 한국에 체계적인 정보 보호 지식 생태계를 만드는 데 밑돌을 놓았다. 팬텀기와 함께 하늘을 수호하다가 50대가 훌쩍 넘어 사이버 공간을 지키는 첨병으로 변신한 것이다.
이 교수는 동국대 요청을 받고 국제정보보호대학원 설립 작업을 주도했다. 여든 살이었던 2014년에는 국제보안자문협의회(IBA)에서 '세계 10대 보안 전문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아시아인으로는 그가 유일했다.
지금도 여전히 대학원에서 손자뻘인 제자들과 함께 신기술을 공부하며 정보 보호의 최전선에 서 있다. 미군 대위를 스승 삼아 팬텀기 배우기에 매달렸던 55년 전 '이 중령'의 청춘은 현재 진행형이다.
[김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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