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박해수의 '벚꽃동산' 강렬한 여운
극작가 안톤 체호프가 쓴
러시아 혁명기 지주의 몰락
한국 재벌가 이야기로 각색
감각적 무대·배우 명연기
고전에 새 생명 불어넣어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그것이 다른 시대의 관객에게도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매회 다른 관객과 배우, 연출이 만나 새로운 울림을 만들어내는 공연 예술은 고전이 갖는 힘이 더 크다. '지금, 여기'의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각색, 관객의 '시선의 자유'를 극대화한 연출이 이뤄지면 공연이 생산하는 반향은 더 깊어진다.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대표작 '벚꽃동산'을 현대의 한국을 배경으로 재해석한 연극 '벚꽃동산'(연출 사이먼 스톤)이 공연 중이다. 텅 빈 무대의 한가운데 세모난 형태의 2층 집이 놓여 있다. 하얀 무대 위에 집의 지붕도 프레임도 하얘 마치 지면의 일부처럼, 지면에서 솟아난 것처럼 느껴진다. 유리로 덮여 있어 집안의 모습이 객석으로 훤히 드러난다.
조명이 들어오면 트렌치코트를 입은 한 여자가 무대에 등장한다. 5년 전 아들을 잃고 뉴욕으로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온 송도영(전도연)이다. 파리로 떠났다가 벚꽃동산으로 돌아왔던 원작의 류바를 각색한 인물이다.
연극 '메디아' '입센의 집', 영화 '나의 딸' 등 고전을 재해석한 작품들을 선보여온 연출가 사이먼 스톤은 이번 '벚꽃동산'에서 원작의 몰락한 러시아 지주 가문의 인물들을 한국의 재벌가로 바꿨다. 송도영은 정든 집과 친지들을 만나 기뻐하지만 오빠 송재영(손상규, 원작 인물 가예프)의 방만한 경영으로 가족 기업이 도산 위기에 처한 상태다. 송씨 가문의 운전기사 집안 출신으로 송도영에게 애착이 있는 황두식(박해수, 로파인)이 그들을 도우려 하지만 결국 송도영 일가는 아름다운 벚꽃나무들이 있는 정든 집을 떠난다.
스톤의 '벚꽃동산'은 2024년 한국 관객에게 새로운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원작이 러시아 농노 해방(1861)과 러시아 혁명(1917) 사이 격변기에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면 이번 '벚꽃동산'은 정경유착으로 성장한 한국 재벌의 후손들이 시대에 뒤처지며 몰락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가족 간의 끈끈한 사랑, 단기적이고 속물적 사랑을 하는 남녀 등 오늘날 한국의 세태를 반영한 장면들도 눈에 띈다. 사회성이 떨어지는 박사과정생 변동림(남윤호, 트로피모프)이 도덕성을 부르짖으며 기업가와 사회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장광설은 '화려한 도덕 쟁탈전을 벌이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이라는 평을 받는 한국 사회의 기만적 세태가 떠오르게 한다.
연극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스톤 특유의 연출도 돋보인다. '벚꽃동산'의 인물들은 집의 안과 밖, 1층과 2층, 지붕 위에서 동시에 대사를 뱉고 각자의 행동을 한다. 관객은 누구의 대사에 집중해야 할지 처음에 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점차 연극의 흐름에 빠져든다. 무질서하게 극이 진행되는 듯하지만 어떤 대사와 행동에 주목해야 하는지 곧 파악이 되기 때문이다. 스톤과 배우들은 현실의 즉흥 대화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는 대사들 속에서도 관객이 중요한 부분에 집중할 수 있게 정교한 계획을 짰고 무대 위에서 그것을 성공적으로 구현해낸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때그때 원하는 인물의 발화에 집중할 수 있어서 사람마다 공연을 다르게 경험할 수 있다.
스톤의 '벚꽃동산'은 무대 미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유리로 덮인 투명한 집은 관객이 인물들의 삶을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고, 2층에서 송도영의 딸 강해나(이지혜, 아냐)가 변동림과 정사를 하는 장면에서는 관음증적 분위기도 만들어낸다.
전도연, 박해수 등 출연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도 희극이면서 비극이고, 비극이면서 희극인 '벚꽃동산'의 매력을 살린다.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27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선 전도연은 티 없이 맑은 영혼을 가졌지만 큰 상처를 품고 있는 송도영을 품격 있게 연기한다. 박해수는 성공을 향한 열망과 출신에 대한 열등감이 공존하는 인물 황두식을 카리스마 있게 연기하며 무대를 휘어잡는다. 공연은 7월 7일까지 서울 LG아트센터.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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