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정책도 ‘대화’보다 ‘대결’…힘겨루기만 남은 한반도
군사 긴장 고조되면 통일 정책도 강경해지는 악순환
“통일부 고유 역할 보호할 방안 고민 필요”
9·19 남북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계기로 북한과의 대화보다는 대북 압박에 무게를 둔 윤석열 정부의 통일 정책이 남북 긴장을 오히려 고조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특히 남북 관계 위기 상황에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통일부는 군사적 상황에 종속된 채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국방부와 통일부는 지난 4일 9·19 남북 군사합의의 효력 정지를 발표하면서 2018년 판문점선언, 2004년 6·4 합의,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의 법적인 효력은 없다고 밝혔다.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에 대한 제도적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남북 합의가 법적으로 아무 의미 없다고 정부가 공식화한 것이다.
정권과 무관하게 대한민국 정부가 오랜 시간 쌓아온 남북 합의의 역사를 일거에 법적 잣대로 재단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한 정부 관계자는 5일 통화에서 “남북 합의를 주관하는 부처(통일부)가 남북 합의서 폐기를 위한 법적 검토를 하고, 부처 고위 관계자가 남북 합의의 법적 효력이 없음을 공식화하는 자리에 참석해야 했다”며 “상황이 모순적일 뿐 아니라 너무나 절망적”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역사적으로 안 좋은 선례를 만든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더 큰 문제는 통일 정책이 남북 군사 상황 악화에 따른 충돌을 제어하기보다 오히려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전날 9·19 합의 효력 정지가 통일 정책상 맞다고 판단했느냐는 질의에 “북한의 도발에 대한 대응조치”라며 “9·19 합의는 유명무실화됐고 합의에 따라 우리의 군사적 활동은 많이 제약돼왔다”고 답했다. 통일 정책 측면이 아닌 군사 활동 제약을 들어 효력 정지의 정당성을 강조한 발언이다. 통일부의 다른 고위 당국자는 지난달 기자들과 만나 “교류 협력이나 대화는 통일부의 대단히 중요한 역할”이라며 “다만 대화·교류·접촉의 상대인 북한의 태도 변화도 염두에 두고 이 문제를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대북 압박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읽힌다.
지난달 발간된 2024 통일백서에서도 1년 전보다 남북 관계를 대결적으로 보는 인식이 짙게 드러났다. 남북 연락 채널·남북 회담 대비 역량 강화 관련 내용이 지난해에는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 추진’이라는 소제목 아래 담겼지만 올해는 ‘대북 협상 역량 강화’ 부분에 기술됐다. 백서 제일 앞부분에는 윤 대통령이 2022년 광복절에 제안한 북한 비핵화 로드맵 ‘담대한 구상’을 소개하며 미국 등 국제사회의 지지를 확보했다고 기술했다. 북한은 ‘담대한 구상’이 발표되자마자 거절했다.
정부가 2022년 발표한 새 통일·대북 정책 ‘비핵 평화 번영의 한반도’ 세부 목표에는 ‘역대 정부에서 이룬 남북합의 정신을 존중하면서 그 성과는 이어받아 발전시키겠다’ ‘남북 간 우발적 무력 충돌을 방지하고 군사적 신뢰를 구축하는 노력도 지속해 나갈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이 원칙이 현재도 지켜지고 있다고 보긴 힘들다.
당시 정부가 발간한 정책 소개 책자에는 ‘판문점 선언 등 기존의 남북 합의는 계승하나요’라는 자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통일·대북 정책은 지금까지의 성과들을 토대로 일관성을 유지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윤석열 정부도 그간의 대북 정책을 이어달리기 하면서 성과를 계승하는 동시에 과거의 잘못된 점을 발전적으로 개선해 나갈 것”이라며 “역대 정부가 체결한 남북 합의는 존중돼야 할 중요한 자산”이라고 실렸다.
정부의 남북 관계 관리 역량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통일 정책은 남북 간 위기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북한 전문가는 “정권 임기는 5년이지만 미래에 다시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때를 대비하는 것도 현 정권의 임무”라며 “통일부의 위상과 고유의 역할을 보호할 방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1994년 김영삼 정부가 발표한 한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을 수정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30년간 역대 정부는 모두 한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을 계승해왔다. 새 통일 방안은 연내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유새슬 기자 yoos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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