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성폭행' 재점화…솜방망이 처벌에 불붙는 '사적제재'
(서울=연합뉴스) 박형빈 최원정 기자 = 20년 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당시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신상이 최근 한 유튜버에 의해 폭로되면서 사건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이들의 신상 공개가 법적 테두리를 벗어난 '사적제재'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호응하는 데에는 '피해자는 고통 속에 사는데 가해자는 잘산다'는 사실에 대한 국민적 공분에, 범죄자를 단죄하는 사법 체계에 대한 불신이 더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1일 한 유튜브 채널은 '밀양 성폭행 사건 주동자 000. 넌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나 봐'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올렸다.
이후 연이어 게시된 영상에는 당시 성폭행에 가담했다는 가해자들의 이름과 얼굴, 나이, 직장 등이 구체적으로 담겼다.
이들은 논란이 거세지자 현재 직장에서 해고됐다. 가해자가 일했던 곳으로 알려진 경북 청도의 한 식당은 백종원까지 방문한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었지만 논란이 일파만파 번지면서 결국 영업이 중단됐다.
이 사건은 2004년 12월 경남 밀양의 고교생 44명이 여학생 한명을 집단 성폭행한 사건으로, 가해자들은 당시 미성년자였던 점, 피해자 측과 합의한 점 등을 이유로 대부분 법망을 빠져나가거나 소년부 송치로 마무리됐다.
이들의 신상을 공개한 유튜브 채널은 구독자가 6만명에서 5일 오후 30만명을 돌파했고, 해당 영상의 댓글은 대부분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을 비난하고 유튜버를 응원하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수만원의 후원금을 보낸 시청자도 여럿 있다.
해당 유튜버는 폭로를 결심한 이유에 대해 "나는 그저 사회에 대해 화가 많은 사람일 뿐"이라며 "정의감 때문에 이런 영상을 만들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처럼 공공기관이 아닌 사인(私人)에 의해 범죄자의 정보가 공개되는 신상 폭로 식 '사적제재'는 SNS의 대중화로 빈번하게 발생하는 추세다.
인신을 제약할 수 없지만 정보통신망에서 신상이 유포되는 것만으로도 현대사회에서는 사실상 '처벌'에 가깝다.
지난달 강원도 인제의 한 부대에서 발생한 훈련병 사망사건과 관련해서도 수사 대상에 오른 중대장의 신상이 인터넷에 빠르게 퍼졌다. 비슷한 시기 여자친구를 서울 강남역 건물 옥상에서 살해한 20대의 출신학교와 이름도 수사 초기 단계부터 온라인에 유포됐다.
직장인 조지한(32)씨는 "범죄자들이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제대로 받았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며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잘 먹고 잘산다고 하니 누군가의 신상 폭로로 통쾌함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사법 정의'에 대한 국민 신뢰가 깨졌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경찰과 검찰, 법원 모두가 집단성폭행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고 피해자는 만신창이가 됐다"며 "사법 시스템의 붕괴가 배경에 있고, 법·정의적 측면에서 온당치 못하니 불법으로라도 신상을 공개하고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이들이 등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도 "상응하는 처벌이 이뤄졌다면 (개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일을 할 이유가 없다"며 "처벌할 수 없거나 처벌한다고 해도 시민의 법 감정을 충족시킬 수 없을 정도로 처벌 수위가 낮다는 제도적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러한 방식의 신상 공개가 형법상 명예훼손 또는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소지가 있고 자칫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혹은 진위가 불분명한 정보일 경우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가해자 위주로 짜인 현행 사법 체계를 피해자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교수는 "극단적으로 미국의 특정 주(州)는 성폭력 전과자가 사는 집에 팻말을 꽂아 넣기도 한다"며 "지금 (우리나라 경·검의) 신상 공개는 '잘못하면 망신당하니 알아서 조심하라'는 경고의 의미만 있을 뿐 확신범 등 처벌이 두렵지 않은 사람에게는 효과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탁 제도 등 근본적으로 가해자 중심의 사법 구조를 수사·재판 과정 전반에 걸쳐 수술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법무법인 앨케이비엔파트너스 허윤 변호사는 "국가가 해줄 수 없는 일에 대해 부모와 피해자에게 어느 정도 자율성을 부여하는 제도는 필요하다"며 "특정 요건 아래에 당사자는 민형사상 법적제재를 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질적인 '솜방망이 처벌'을 막기 위해 양형 기준을 대폭 손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재판부는 법과 제도에 기반해 선고하는데 양형위원회의 권고 형량과 법정 형량을 준수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며 "법원에 대한 비판도 이해하지만, 국회와 시민사회도 적극적으로 기준 개정에 목소리를 내줘야 한다"고 말했다.
binzz@yna.co.kr, away77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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