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쓰면서 5번 유산했지만 정부는 ‘관련성 없다’며 외면”···유산·사산 피해 인정 않는 환경부

김기범 기자 2024. 6. 5.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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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일 서울 노을공원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추모의 숲’을 찾은 민수연씨가 자신이 유산으로 잃은 다섯 태아와 비슷한 시기의 초음파 태아 사진을 들고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서울에 사는 민수연씨는 2002년에서 2008년 사이 6년 동안 5차례에 걸쳐 유산으로 태아를 잃었다. 민씨가 유산을 경험한 시기는 1994년부터 2011년까지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던 시기와 겹쳐있다. 1994년은 SK케미칼의 전신인 유공이 가습기살균제를 국내에서 처음 출시한 때이고, 2011년은 정부가 가습기살균제의 유해성을 처음 인정하고, 회수 조치를 단행한 때다.

민씨는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에 따라 피해자로 인정 받았다. 지난해 9월 환경부는 그의 피해 정도를 ‘중증’이라고 판정했다. 환경부는 민씨의 유산과 가습기살균제의 관련성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민씨처럼 가습기살균제 사용으로 유산·사산을 겪은 이들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2020년 환경부 국립환경과학원의 용역 연구에서도 관련성이 크다는 결과가 나온 만큼 정부가 유산·사산 피해자들을 더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환경부가 유산·사산을 겪은 이들을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인정한 사례는 5건이다. 유산·사산에 대한 인정이 아닌 산모가 피해자인 경우에 한정돼 있다. 또 이들은 병원비 지원 수준의 극히 제한적인 지원만 받고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와 환경보건전국네트워크는 5일 오전 서울 새문안로 환경보건시민센터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유산·사산 피해 사례들과 가습기살균제와 유산·사산 피해에 대한 환경부 용역 보고서의 내용을 공개했다. 이날 센터가 공개한 보고서는 환경부 국립환경과학원이 2020년 용역을 발주해 대한예방의학회가 수행, 작성한 ‘국민건강보험공단 빅데이터를 이용한 가습기살균제 건강피해 규명 연구(Ⅱ)’ 보고서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왼쪽)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민수연씨(왼쪽에서 두 번째) 등 피해자들이 5일 서울 종로구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가습기살균제와 유산·사산과의 관련성 증거자료와 피해 사례를 공개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해당 보고서에는 “20∼45세에 이르는 거의 모든 연령대에서 2012∼2013년에 (유산·사산에 대한) 전면적인 상대위험도 감소가 나타났다”며 “단기간에 이러한 전면적이고 급격한 상대위험도 감소가 관찰된 것은 가습기살균제와의 관련성을 강하게 시사하는 소견”이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국민 전체의 의료보험 자료를 이용한 빅데이터 연구 결과 가습기살균제 사용이 금지된 직후인 2012~2013년에 유산·사산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내용으로, 가습기살균제 사용이 임신부들의 유산·사산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보고서에는 가습기살균제로 유산·사산 피해를 겪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이미 광범위한 전문가들의 합의가 존재”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센터는 이날 회견에서 “환경부는 같은 보고서에서 유사한 관련성을 보인 것으로 나타난 질환들에 대해선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판정하고 있음에도 유산·사산은 관련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센터는 이날 민씨 외에도 옥시싹싹뉴가습기당번과 애경 가습기메이트를 사용했던 2006년 임신 7주차에 유산을 경험한 홍향란씨의 사례와 2002년 8~9월 사이 4개월 차인 태아를 사산한 서은진씨의 사례 등도 공개했다.

센터는 “환경부의 용역을 통해 유산·사산의 가습기살균제 관련성에 대한 분명한 과학적 연구가 이미 나와있고, 피해 사례도 다수인 만큼 환경부는 유산·사산을 경험한 이들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센터는 이어 “병원비 지원 수준이 아닌 산모와 가족의 고통, 태아의 고통에 대한 위자료 성격의 지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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