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엔 없어서 못 팔았는데"…태극기도 중국산이 점령 [현장+]
“누가 요즘 국기를 걸기나 하나요. 젊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사는 건 최근 3년 새 한 번도 보질 못했어요.”(태극기 판매상인 송태백 씨(66))
5일 오후 서울 관수동 휘장 상가 골목 안. 현충일을 하루 앞둔 골목엔 태극기 구매를 위해 들른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고, 한때 수십 곳에 달했던 태극기 판매상점은 대여섯 곳의 업체만이 남아 있었다. 40년간 휘장 골목 내 태극기를 판매해왔다는 송 씨는 “국가 기관에서 행사가 있어 도매로 구매할 때만 판매가 이뤄질 뿐 낱개로 태극기를 구매하는 경우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 지하철 4호선 종로3가역 뒤편에 있는 휘장 상가 골목은 1950년대부터 태극기를 판매하는 상권으로 유명했던 상가 거리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엔 상패나 명패, 트로피 등 각종 휘장과 태극기를 제작·판매하는 업체들이 100여곳에 달했다. 이곳 상인들은 “태극기가 잘 팔릴 때는 하루에도 수백장씩 팔리는 시기가 있었다”라면서 “1988 서울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이 열릴 당시엔 태극기를 대량으로 들여와도 오전 몇시간 새 매진되곤 했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이날 찾은 골목 내 상점들은 60여곳으로 줄었고, 이마저도 판매 부진으로 폐업 직전에 놓인 곳들도 많았다. 종로3가역 인근서 국기를 제작·판매 중인 이래원(80) 플래그몰 대표는 2000년대 초부터 태극기를 판매해 온 상인으로, 2000년대 초 서울 신설동에 자리 잡고 148㎡(45평) 규모의 태극기 판매 업체를 운영해왔다. 하지만 태극기가 팔리지 않아 몇년 전 관수동으로 옮겨 15평(49㎡)짜리로 이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태극기 판매 상인은 “태극기 판매를 위해 국경일마다 인근 아파트들의 게양상태를 파악하는데 20여년 전만 해도 다섯 집 중 한 집은 태극기를 걸어왔지만 지금은 아파트 한 동에 한 집도 걸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면서 “인건비는커녕 임대료도 내지 못할 정도로 태극기 수요가 줄어 업체를 더 이상 운영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오프라인뿐 아니라 온라인 판매도 부진하긴 마찬가지다. 값싸고 구매가 편한 중국산 태극기를 시민들이 주로 구매한다는 것. 이 대표는 다음 등 주요 포털사이트에 광고를 올려놓고 판매하고 있지만, 최근 석 달간 태극기 판매량은 단 1건에 불과하다고 했다. 90㎝x135㎝ 가정용 태극기를 6000~7000원대에 판매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중국산 저가 태극기 상품에 밀렸다.
이 대표는 “부산과 대구의 태극기 생산 공장에서 대부분 떼오는데 한번 도매로 수천장 찍어내려면 기본 단가가 1000만원 이상”이라며 “수천장씩 구매하는 업체들이 예전같이 많지 않다 보니 판매 공장들도 ‘이대로 가다간 폐업 위기에 놓였다’고 토로”한다고 설명했다.
태극기는 내구성이 높아 한 번 사면 오랜 기간 동안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판매가 이뤄지기 위해선 새로운 수요층인 젊은 세대들의 태극기 구매가 이뤄져야 하는데, 이게 잘되지 않고 있다고 상인들은 입을 모았다. 또 신축 아파트들은 태극기 게양을 할 공간 자체가 없어진 것도 문제다. 최근 타워형, 통 유리식의 아파트가 늘어남에 따라 국기게양대가 설치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요즘 창호는 과거와 다르게 여닫는 기능이 아니라 조망을 더 중시하는 창문 위주로 바뀌고 있다“며 ”특히 ‘입면분할창호’가 나오면서 문을 열어 태극기를 꽂는 것 자체가 어려운 설계들이 나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입면분할창은 유리창의 상·하부가 나뉘어 아래쪽은 난간 역할을 하고 위쪽 창만 열리는 구조의 창문을 말한다.
서울 흑석동 시민 30대 이모 씨(35)는 “아이 유치원 숙제로 ‘태극기 게양하기’를 내줘서 태극기를 사서 다려고 보니 유리 난간으로 구성된 아파트 구성상 태극기를 게양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일각에선 머지않아 태극기 게양 문화가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40년간 국민들의 태극기 게양에 앞서왔다는 황선기 태극기선양회 회장은 “태극기를 거는 것은 단순 요식행위가 아닌 국가를 기리는 행위“라면서도 “무관심한 상태가 지속된다면 태극기 자체를 기리거나 집마다 게양하는 문화가 머지않아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정훈 기자 ajh632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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