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오르자마자 쏟아낸 두얼굴 연기… 비극조차 웃음으로 승화
아들 죽음 이후 돌아온 여자役
현실과 정반대 감정 전달하는
야누스적 연기에 감탄 쏟아져
대사 타이밍도 설계된 배우연기
불안감까지 조성된 무대 연출로
관객들에게 ‘보는 재미’ 더해
“돌아와서 행복해. 봐, 웃고 있잖아.”
지난 4일 막을 올린 안톤 체호프 원작 연극 ‘벚꽃동산’(연출 사이먼 스톤)에서 송도영(전도연 분)이 등장하며 뱉은 대사다. 연극 시작 2분도 안 돼 관객들은 숨죽였다. ‘칸의 여왕’이라고 하는 배우 전도연이 27년 만의 연극 무대에 올랐기 때문만은 아니다. ‘행복’과 ‘웃음’을 말하고 있지만, 표정과 목소리로는 정반대 감정을 전달하는 야누스적 희비극 연기에 대한 감탄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국면에 휩쓸린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린 원작을 현재 서울에 맞춰 각색한 작품이다.
이날 객석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뉴욕에서 서울로 5년 만에 돌아온 송도영의 “왜 이렇게 늙었어요?”라는 질문에 변동림(남윤호 분)은 “세월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거죠”라고 답했다. 이에 송도영이 객석을 바라보며 “난 잘 피한 것 같은데?”라고 되받는 청승 연기가 반복됐다. 변동림은 송도영의 죽은 아들의 생전 과외 교육을 맡았던 인물로 체호프 원작에도 비슷한 설정의 인물이 있지만 이 같은 코미디 요소가 각색에서 추가됐다. 송도영의 오빠 송재영(손상규 분)이 낡고 오래된 것을 향한 애정을 속사포 대사로 표현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송도영과 송재영이 벚꽃동산 상실의 직전까지도 태평해 보이는 점은 원작과 같았다. 다만 다 잃기 전에 가문 사업을 부분 매각해야 한다고 답답해한 황두식(박해수 분)에게 송재영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를 인용할 수 있나, 자네는?”이라고 엉뚱한 말을 건넸다. 이에 황두식이 “당신은 고장 난 벽시계야. 뻐꾹! 뻐꾹!”이라며 비슷한 발음의 욕설까지 덧붙이자 객석에서는 폭소와 박수가 터졌다. 답답증에 시달리던 황두식이 그 심정과 정반대 가사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도 폭소가 이어졌다.
이와 같은 코미디 요소는 배우들이 살려내는 ‘말맛’으로 극대화됐다. 실제 수년간 알고 지낸 사이처럼 상대의 의중을 정확하게 가늠하는 대화를 연기했다.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그 다음 문장이 띄어쓰기 없이 바로 튀어나오는 타이밍만으로 웃음을 끌어내기도 했다. 특히 상대의 대사가 끝나기 전에 다른 배우들 대사가 겹치면서, 객석에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상황까지도 설계된 연출이었다. 캐릭터 설정부터 그 작명까지 자신의 의견을 십분 반영한 배우와 배역의 일체감이 돋보였다.
희극과 비극의 반전은 한순간에 이뤄졌다. 송도영은 불쑥 “다 무너지고 있다”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결말을 암시하면서 분위기를 뒤집는 이 대사로 객석을 붙들었다. 서울을 떠난 계기였던 아들의 죽음 당시에 자신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털어놓으며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그 사건 이후 술에 중독된 송도영과 같이 등장인물 저마다의 황폐한 내면을 들추는 장면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칼을 품고 있고, 약에 취한 듯 비틀거리거나 계속 화를 내는 인물도 있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희극과 비극 사이를 오가는 극 자체가 현실의 반영이었다.
이 같은 연출 의도는 무대 장치로 뒷받침됐다. 송도영의 딸 강해나(이지혜 분)가 생일을 맞아 모두로부터 축하받는 동안 그의 방은 풍선으로 가득했다. 단색의 흰 세트가 색색의 풍선으로 알록달록했다. 동시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태의 불안감을 조성했다. 주택 단면을 형상화한 세트 위에 얹은 계단도 도중에 끊어진 상태. 그 꼭대기에서 변동림은 서울로 돌아온 강해나를 반기며 “어떻게 이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우면서도 무의미할 수가 있지?”라고 말했다. 첫 무대를 마친 배우들 표정은 홀가분했고 객석은 박수가 오랫동안 멈추지 않았다.
이날 공연에는 해외 공연계도 큰 관심을 보였다. 미국의 토니상과 영국의 올리비에 어워드 연출상을 받은 벨기에 연극감독 이보 반 호브도 관람했다. 한국에서의 공연은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다음 달 7일까지.
서종민 기자 rashomo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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