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못 버틴다”…무관심 속 中서 철수하는 기업들
불확실성 제거 못 하는 정부…21개월 만에 경제 수장 ‘화상’ 만남
(시사저널=허인회 기자)
2016년 한국 정부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도입 이후 시작된 중국의 '한한령(限韓令·한류 금지령)'. 국민적 분노가 들끓은 지 8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사이 한국 기업들은 정부와 국민의 무관심 속에서 조용히 짐을 싸고 있다.
최근 롯데그룹은 중국 현지에서 마지막까지 운영하던 롯데백화점 청두점을 연내 매각하기로 했다. 다른 기업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지 법인을 청산하거나 합작 법인의 지분을 매각하는 등 중국 사업에서 손을 터는 분위기다.
재진출 여부도 가늠하기 어렵다. 중국 제품의 경쟁력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고, '애국소비'로 대표되는 중국 소비자들의 선호도 변화 등 시장 환경이 좋지 않아서다. 그럼에도 중국 시장에 대한 관심을 줄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세계 최대 시장을 포기할 경우 결국 우리만 손해라는 의미다.
韓 기업들, 떠나거나 허리띠 졸라매거나
재계에 따르면 롯데그룹은 연내 롯데백화점 청두점 매각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대다수 현지 사업을 철수한 가운데 마지막 남은 청두점마저 올해 안에 정리하겠다는 의미다. 롯데는 2008년부터 추진해온 대형 프로젝트 '선양 롯데 복합타운'도 중국 선양시 자회사에 매각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사드 문제로 중국 정부로부터 사실상 직접 보복을 당한 롯데는 코로나19와 중국의 경기 침체 등 악재가 겹치면서 1994년 진출 이후 30년 만에 중국 사업에서 손을 뗄 전망이다.
다른 기업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21년 베이징 1공장, 2023년 충칭 공장을 매각한 현대차는 올해 안에 창저우 공장도 매각한다는 방침이다. 한때 중국에 5곳에 달하는 공장을 운영했으나 이를 2곳으로 줄인다는 계획이다. 현대차가 중국에서 덩치를 줄이는 이유는 매출 부진 때문이다. 현대차 중국 법인인 베이징현대 매출은 2016년 20조1287억원에서 2023년 4조9003억원으로 감소했다. 7년 만에 매출이 75%가량 쪼그라든 상황이다.
기아는 공개적으로 "증자 계획은 없다"며 추가 투자 계획이 없음을 못 박기도 했다. 주우정 기아 부사장은 지난 1월 컨퍼런스콜에서 "중국은 가격이 저가로 구성되고, 경쟁이 심화해 가장 어려운 상황이다. 현시점에서 한마디로 '버티기'를 하고 있다"며 "중국 법인이 자체적인 유동성을 확보하는 부분으로 계획하고 있고, 결론적으로 지금은 증자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고전하는 배경엔 복합적인 요인이 깔려있다. 사드 사태 이후 한중 관계가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제로 코로나 정책, 애국소비 현상 등의 여파가 가장 크다. 동시에 산업구조 고도화와 중국 제품의 경쟁력 상승으로 한국 제품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은 상황이다.
2018년 이후 기업들이 꾸준히 중국을 떠나면서 투자 역시 줄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최지원 전문연구원은 "대중국 투자가 2000년대 초반 수준을 기록하는 등 크게 둔화했다"며 "철수 기조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한국 기업의 대중국 투자가 장기 침체기에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의 대중국 투자 비중은 2.9%로 급감했다. 이 여파로 2013년 한국의 1위 투자 대상국이었던 중국은 지난해 베트남(5위), 인도네시아(6위)에 이어 7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미·중도 협의체 90개인데…21개월 만에 대화한 한·중
정부가 경색된 양국 관계를 해결할 실마리를 좀처럼 잡지 못하면서 기업의 부담이 더욱 커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철수를 진행한 한 기업 관계자는 "중국 기업의 성장과 맞물려 사회주의국가 특유의 기업 관리 등에서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며 "악화한 한중 관계가 언제 개선될지 모르는 불확실성도 철수를 결정하게 된 원인 중 하나"라고 밝혔다.
실제로 사드 배치를 결정한 박근혜 정부를 거쳐 친중 성향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관계 개선의 기대를 품었지만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었다. 윤석열 정부도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최근에야 한중 경제 수장들이 만남을 가졌을 뿐이다. 5월16일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정산제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주임과 화상 회의를 가진 바 있다. 2022년 8월 이후 21개월 만에 열린 한중 경제장관회의였다. 하지만 정부도 "양국 간 협력 의지를 재확인했다"는 정도의 평가를 내놨을 뿐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다.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중국학)는 "악화일로의 미·중 관계 속에서도 90여 개 대화 협의체가 존재한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면서 "대화를 통해 설명하고 설득하면서 갈등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시장과 기업이 느끼는 불확실성은 상당 부분 감소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장기적으로는 중국 시장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 다음으로 구매력이 높은 시장을 배제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얘기다. 김동수 산업연구원 산업통상연구본부장은 "14억 인구 가운데 동부 연안에 위치한 5억 인구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 수준"이라며 "지리상 가깝고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시장을 포기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기업들도 비슷한 생각이다. 지난 1월 한국무역협회가 대중국 수출기업 570개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향후 중국 사업을 확대하겠다고 답변한 기업은 45.8%에 달했다. 축소하거나 철수하겠다는 기업은 13.8%에 그쳤다. 중국 시장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기존과는 다른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 본부장은 "한일 관계가 좋지 않아도 대일 무역 적자 규모는 250억 달러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면서 "이는 일본산 소재·부품·장비의 한국 시장 침투도가 높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기업들도 중국 시장·소비자 등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공략 지점을 새롭게 수립할 시점"이라고 조언했다.
강준영 교수 또한 "지금은 중국의 산업구조가 고도화하면서 한중 교역에도 변화가 일어나는 조정기"라면서 "경쟁력 있는 한국산 중간재·소비재를 개발하며 다가올 리커플링(재동조화)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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