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삶 속에서 고단한 현실 노래한 詩心은 영원하리

김용출 2024. 6. 5.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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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신경림 시인, 삶과 시를 돌아보다
중학시절 백석 시 접하고 문학 매료
대학 2학년 때 ‘갈대’로 등단했지만
이듬해 봄 돌연 낙향… 10년간 절필
농사에 장사·광산·공사장 일까지…
“현실 동떨어진 문학 안할 것” 다짐
작품 활동 재개… 시집 ‘농무’ 발표
민중의 삶을 민요적 방식으로 형상화
고은 등과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도
“서사시 확장” 평가… 韓문학 큰 족적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그해, 읍내 책방에서 잡지 ‘학풍’을 뒤적이던 중학생의 눈길이 어느 페이지에서 멈췄다. 책을 떨어뜨릴 정도로 전율했다. 중학생 신응식의 영혼을 뒤흔든 것은 바로 백석의 명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었다. 아, 시란 이런 것이로구나.
지난달 작고한 신경림 시인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글을 쓰고 싶어 했다. 그는 이념이 아닌 현실에서 민중을 찾았고, 민요와 무가 등을 적극 활용하는 등 현대시의 갱신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얼마 전 구독하던 잡지를 통해 백석의 시 ‘여우난골’과 ‘비’를 접하고 백석이 좋아졌고, 또 그 몇 해 전 초등학교 시절엔 공책에 쓴 목계나루 단상이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며 친구들의 주목을 받던 그였다. 곧바로 잡지를 구입했고, 나중에는 백석의 시집 ‘사슴‘을 구해 읽었다.

“나는 아직도 ‘사슴’을 처음 읽던 흥분을 잊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읽고 또 읽었다. 저녁밥도 반 사발밖에 먹지 못했으며 밤도 꼬박 새웠다. 그 뒤 ‘사슴’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꺼내 읽고는 했으니, 실상 그것은 내가 시를 공부하는 데 교과서가 되었던 셈이다.”(‘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고교 시절 학과 공부보다 문학에 더 열심이었다. 대한교육연합회 주최 중고 문학콩쿠르 대회에 참가해 산문 부문에서 당선됐고, 교지에는 평론 ‘이형기론’을 발표했다. 특히 고교 3학년 여름방학 때에는 입시공부 대신 일어판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독파했고 백석과 이용악, 오장환 등의 시집을 읽었다.

동국대 영문과에 입학한 그는 선배 유종호와 함께 하숙하는 한편, 독서회에 가담해 다양한 책을 읽었다. 1956년 늦가을 이한직 시인의 추천으로 잡지 ‘문학예술’에 ‘갈대’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신인 신경림의 탄생이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갈대’ 전문)

“글을 쓰지 않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지난달 작고한 신경림 시인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글을 쓰고 싶어 했다고, 가족과 지인들은 전했다. 생전 인터뷰나 글, 관련 논문 등을 통해서 신 시인의 삶과 시 세계를 재조명한다.

1935년 충주에서 면서기를 한 아버지 신태하와 어머니 연인숙 사이의 4남 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 신경림은 대학 2학년 때인 1956년 잡지 ‘문학예술’에 ‘갈대’, ‘묘비’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등단 이듬해 봄, 그는 돌연 낙향한 뒤 10년간 절필했다. 아버지가 장사에 실패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운 데다 문단에 대한 실망도 컸기 때문이다.

그는 직접 농사를 짓기도 했고, 장사도 했으며, 공사판이나 광산일을 거들기도 했다. 갖가지 이력과 경력이 추가됐다. 농부, 광부, 장사꾼, 공사장 인부, 학원 강사, 학교 강사…. 이렇게 세상 속에서 뒹군 10년은 나중에 그의 소중한 문학적 자산이 된다. 바로 민중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10년 동안 이것저것하고 돌아다니면서 농민들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됐으니까, 저로선 민중을 발견한 시기였다”며 “만약에 기회가 생긴다면 옛날처럼 사는 것과 동떨어지고 현실하고 동떨어진 문학, 말장난은 하지 않고 진짜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에서 고생하면서 사는 사람들, 현실이나 역사의 피해자 아픔까지 내 아픔으로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1965년 충주 읍내에서 조우한 김관식 시인의 권유로 함께 상경해 김 시인의 홍은동 집에 얹혀살면서 다시 시를 쓰게 된다. 그해 잡지 ‘여상’에 ‘산읍일지’를 발표하면서 활동을 재개한 그는 유종호의 소개로 1970년 ‘창작과비평’에 ‘파장’과 ‘산일번지’, ‘농무’ 등을 차례로 발표했다.

그는 1970년 전후 이야기 요소를 도입해 농촌 현실을 반영하는 시 세계를 형성했다. 특히 이 시기 시편을 모은 시집 ‘농무’는 1973년 자비 출판 형식으로 처음 출간됐다가, 이듬해 제1회 만해문학상을 받은 뒤, 1975년 창비시선 제1권으로 증보 출간됐다. 염무웅은 “참된 민중시, 진정한 현대시를 지향하는 전환기에 있어서 하나의 결정적 이정표”라고 격찬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전통 민요의 율격과 정서를 적극 수용한 시작 활동을 했다. 시집 ‘새재’와 ‘달넘세’, ‘가난한 사랑 노래’, ‘길’ 등을 통해 민중의 현실을 민요적 방식으로 형상화하려 했다. 1984년에는 민요연구회를 조직했다. 대표시 ‘목계장터’나 ‘어허 달구’를 감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목계장터’ 부문)

“어허 달구 어허 달구/ 바람이 세면 담 뒤에 숨고/ 물결이 거칠면 길을 옮겼다/ 꽃이 피던 날은 억울해 울다/ 재넘어 장터에서 종일 취했다/ 어허 달구 어허 달구/ 사람이 산다는 일 잡초 같더라/ 밟히고 잘리고 짓뭉개졌다/ 한 철이 지나면 세상은 더 어두워/ 흙먼지 일어 온 하늘을 덮더라.”(‘어허 달구’ 부분)
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온 ‘가난한 사랑 노래’의 경우 노동운동을 하다가 지명수배를 받아 쫓기던 노동운동가가 지하실 교회에서 치른 비공개 결혼식의 주례를 서고 축시까지 낭독한 뒤 집으로 돌아와서 쓴 시편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가난한 사랑 노래’ 부문)

그는 아울러 농민의 공동체 복원 투쟁을 형상화한 서사시 ‘새재’, ‘남한강’, ‘쇠무지벌’ 3부작을 차례로 쓴 뒤 이를 묶은 연작 서사시집 ‘남한강‘을 발표했다.

“캥매캐갱 캥매캐갱 한바탕 놀아보세// 나무 풀 타는 가뭄 우리 탓이래/ 산짐승 모여 우는 것도 우리 탓이래/ 왜놈 청놈 모아다가 제상을 차려놓고/ 새파랗게 칼을 갈아 우리를 겨눴구나// 캥매캐갱 캥매캐갱 한바탕 뛰어보세.”(‘남한강’, 45쪽)

이 시기, 그는 시대정신이던 민주화 운동에도 헌신적이었다. 1975년 고은, 백낙청, 박태순, 이문구, 염무웅 등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립했고, 1992년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상임의장, 동국대 석좌교수 등도 역임했다. 시인은 1990년대 이후에는 이데올로기의 혼란 속에서 내적 성찰을 지향하면서 다시 서정성을 강화했다. 시집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등을 발표했고, 최근에는 산문시의 경향도 보여줬다.

강정구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신경림의 시가 민중의 개념과 범위를 사회과학적인 인식에서 찾지 않고 현실에서 찾았고, 우리 문학사에서 민요와 무가 등 운문적 서사 전통을 수용하고 발전시킨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고 분석했고, 공광규 역시 민요 양식을 시에 적극적으로 수용해 서성시의 방법적 혁신을 이뤘고, 화자의 변화와 집단놀이를 대거 수용하는 등 서사시의 방법적 확장 역시 이뤘다고 평가했다.

이집트 ‘사자의 서’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한다. 한 번은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죽고,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죽을 때 두 번째 죽는다고. 우리가 시인과 그의 노래를 기억하는 한, 그는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것이다. 바람으로, 장돌뱅이로, 노래로.

“어허 달구 어허 달구/ 차라리 한세월 장돌뱅이로 살았구나/ 저녁 햇살 서러운 파장 뒷골목/ 못 버린 미련이라 좌판을 거두고/ 이제 이 흙 속 죽음 되어 누웠다/ 어허 달구 어허 달구.”(‘어허 달구’ 부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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