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소설 『시누헤 이야기』 완역 유성환 “고대 이집트인들의 삶과 고민 엿볼 수 있기를”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논문을 쓸 때마다 최초의 소설로 알려진 『시누헤 이야기』를 비롯해 고대 이집트 고전 문헌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한국어 완역본은 출간되지 않았다. 이집트학이 자리 잡은 영미권이나 프랑스, 독일어권에선 기본적인 고전은 모두 완역돼 있었다.
2012년 미국 브라운대에서 이집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이듬해부터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고 논문도 쓰면서 공부를 이어갔다. 틈틈이 주요 고전에 음역을 붙이고, 개략적인 번역을 한 뒤, 주석을 붙이는 기초 작업을 했다. 다만 주로 논문 형식으로 발표가 이뤄지면서 작품 전체를 번역, 발표할 기회는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 지난해 봄 출판사에서 번역 제의가 들어오면서 본격 번역에 나서게 됐다.
고대 이집트 문헌학자 유성환 박사(서울대 인문학연구소 선임연구원)가 4000여 년 전 고대 이집트 세계로 안내하는 고전 가운데 하나인 『시누헤 이야기』를 완역하고 해제를 단 『최초의 소설 시누헤 이야기』(휴머니스트)를 출간했다. 고대 이집트어의 다섯 판본을 저본으로 삼고, 여러 언어권의 번역본을 참조해 옮겼다. 근년에 영문 중역본이 나온 바 있지만, 고대 이집트어 원전 완역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설은 고대 이집트 중왕국 초기 제12왕조를 개창한 아멘엠하트 1세(기원전 1985~기원전 1956년)와 그 뒤를 이은 센와세레트 1세(기원전 1956~기원전 1911년)가 다스리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잠깐 고대 이집트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크게 선왕조(기원전 5300년~기원전 3000년), 초기왕조(기원전 3000~기원전 2686년), 거대한 피라미드가 조성되던 고왕국(기원전 2686~기원전 2160년), 인간의 내면이 발견되고 내세와 영생의 관념이 퍼진 중왕국(기원전 2055년~ 기원전 1650년), 람세스 2세를 비롯해 개성 강한 파라오들이 나온 전성기인 신왕국(기원전 1550~기원전 1069년), 후기왕조(기원전 664년~기원전 332년) 등으로 나뉜다. 이후 긴 혼란기와 후기 왕조 이후 그리스와 로마의 지배를 차례로 받으면서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귀족이자 고관, 아시아인의 땅에 자리한 폐하의 영지 담당관, 폐하께서 총애하시는 왕의 진실한 지인이자 종자, 시누헤가 말한다. 나는 그의 주인을 따르는 종자, 귀족이자 높이 칭송받는 이, 케넴수트에 거하시는 센와세레트 폐하의 대왕비이시며 카네페루에 거하시는 아멘엠하트의 왕녀이자 공경 받으시는 여주이신 네페루 마마와의 왕실 사저의 궁인이다.”(22쪽)
아멘엠하트 1세의 궁정 관리인 시누헤는 왕을 대신해 정벌 전쟁에 나섰던 왕자들 가운데 한 명을 수행하던 도중, 국왕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진영을 이탈한다.
“그때 이 원정에서 그의 뒤를 따르던 왕실의 자녀들에게도 (전령이) 보내지니 그중 한 명이 호명될 때 (마침) 내가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가 말할 때 나는 조금 떨어져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심장이 갈피를 잡지 못하며 팔은 늘어지고 사지가 떨리니 숨을 곳을 찾아 펄쩍 뛰어올라 행인과 길이 나뉘는 풀숲 사이로 몸을 숨겼다.”(26~27쪽)
왕세자는 신속하게 수도로 돌아가서 왕위에 올라서 센와세레트 1세로 즉위했고, 국경을 넘어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도망간 시누헤는 그곳 족장의 도움을 받아 정착한다. 시누헤는 족장의 딸과 결혼하고 이방의 땅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지만 늘 고향을 잊지 못하고 돌아가길 희망한다. 왕은 포고령을 내려 늙은 시누헤에게 탈영의 죄를 사면하고 귀국을 허락한다.
“최고위 궁인에게(나) 행해지는 것과 같이 장례 신관이 배정되었으며 접안시설 앞에 자리한 경작지가 포함된 장례 영지가 하사되었다. 내 형상에는 금박이 입혀졌으며 요의는 호박금으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하도록 하신 분은 (바로) 폐하이시니 (일찍이) 미천한 자에게 이와 같은 일이 행해진 전례가 없었다. (마침내) 정박하는 날이 올 때까지 나는 폐하의 총애 속에 살리라.”(124~125쪽)
작품은 고대 이집트 중왕국 시대인 기원전 1911년~기원전 1830년 사이 고전어로 창작되고 신관문자로 기록된 고대 이집트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이집트를 떠났다가 돌아온 귀족이자 궁인 시누헤의 삶과 모험을 통해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삶과 욕망, 꿈을 원형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소설 필사본은 지금까지 32점(파피루스 7점, 석편 25점)이 발견됐는데, 다른 서사문학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이다.
고대 이집트 고전에 담긴 4000여 년 전 이집트인들의 삶과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최초의 소설’ 속에 담긴 고대 이집트 문명은 어떤 모습일까. 이집트 문헌학자 유성환의 여로는 어디로 향해 나아갈까. 유 박사를 지난달 30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이번 완역 과정에서 제일 힘든 건 무엇이었는지.
“너무 학술적으로 번역하면 일반 독자들이 읽기 어려울 것이고, 문학 작품이어서 접근성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고대 이집트어가 한국어와 워낙 달라서 직역을 하면 말이 안되는 경우가 많아서 적당한 표현을 찾는 것도 고민했다. 신화와 왕이 나오는데다가 이에 맞는 분위기나 용어, 예법이 있어서 의고체를 쓸 수밖에 없었다.(‘돌무화과 인근’, ‘두 진리 수로’ 등 재미있는 지명(번역)도 눈에 띄더라.) 작품에 나오는 지명을 확정해 번역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많은 논문이나 자료를 참고했다. 4000년 전 이 글을 쓴 사람은 당시 이집트인들이 다 아는 지명이었기에 자세히 적지 않았을 것이다. ‘돌무화과 인근’이나 ‘두 진리 수로’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각주로 했는데, 지명의 의미를 풀어주면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레퍼런스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번역했다.”
―왜 시누헤가 갑자기 도망쳤을까.
“주인공이 도망을 안 가면 이야기 전개가 되지 않아서 도망가지 않았을까(웃음). 시누헤가 왜 도망갔을까를 두고 수많은 해석이 있었다. 역사적 기록은 없지만, 어떤 궁정 암투가 있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집트를 비롯해 중근동에선 왕 대신 왕세자가 원정을 가는 경우가 많지만, 왕이 곧 죽을 상황이라면 왕위 계승자는 원정을 가지 않는다. 왕세자를 비롯해 왕자들이 원정 중에 왕이 갑자기 죽었다는 것은 미리 대비하지 못한 죽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세자가 마치 매처럼 서둘러 수도로 급히 복귀해 왕위에 오르기도 한다. 시누헤는 이때 어떤 이야기를 들었고 권력 암투에 휩쓸릴 까봐 도망가지 않았을까 추론한다.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 다른 문헌을 보면, 왕이 호위병에게 죽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내용도 있다.(사면 받은 시누헤는 왕을 만날 때에도 매우 두려워하는데.) 역모나 궁정암투는 국사범으로, 사면을 시켜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궁정 암투에 연루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은 돌아온 시누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기도 한다. 시누헤가 정신을 못차리는 것은 아마 전제군주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였을 것이다. 생사여탈권을 왕이 쥐고 있으니까. 게다가 왕은 네가 스스로 도망간 것이라고 일관되게 이야기를 하고.”
―시누헤는 먼 이방에서도 적응을 잘하고 이집트인이라는 마음을 잃지 않는데.
“시누헤는 현지 족장의 마음에 쏙 들어서 총애를 받고, 능력도 발휘해 전략도 짜고, 자신을 시기하는 용자와 싸워 이기기도 한다. 이집트인이 쓴 작품으로, 문맥을 보면 이집트인은 어디 가도 우수하다는 신념이 들어가 있을 수 있다.”
―시누헤는 왜 이집트에 돌아가서 죽기를 희망했을까.
“이집트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큰 사건이 찾아오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존재는 계속 된다고 생각했다. 즉, 영혼은 오시리스 신이 있는 지하세계(명계)에 가서 영원히 산다고. 그런데 영생을 하기 위해선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시신을 미라로 만들고, 장례절차를 엄수하며, 시신을 잘 보존할 무덤을 지어야 한다. 하지만 외국에서 아무리 성공해도 이것이 될 수 없는 것으로,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모험소설이라는 점에서 동시대의 「길가메시 서사시」와 비교되는 것 같다.
“시누헤는 왜 자신에게 이런 운명을 부여해 파란만장하게 만드셨느냐, 이 정도면 되지 않았느냐, 자신을 보내달라고 신에게 기도한다. 아울러 왕에게 조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하기도 한다. 소설은 이집트인들이 품었을 만한 근원적인 질문, 즉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를 묻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삶의 의미를 신과의 관계, 왕과의 관계에서 찾았던 것 같다. 신이 자신에게 운명을 부여하면 자신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왕과 얼마나 친소 관계에 있는가. 아울러 작가는 시누헤의 도주 이야기를 시원하게 밝히지 않아서 독자들을 추론하게 만드는데, 독자들에게 감정을 이입시켜 주인공의 처지가 한번 되게 해보려 했던 것 같다. 내가 이 상황이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를 통해서 이집트인으로서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것 같다.”
오, 이런 문명이 있었다니. 고대 이집트 유명한 파라오인 람세스 2세 일대기를 그린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 시리즈를 재미있게 읽었다. 지금으로부터 4, 5000년 전 이집트 문명의 놀라운 이야기였다. 책이 잔잔한 바람을 일으키면서 고대 이집트 관련서들이 잇따라 번역 출간됐다. 고대 이집트 문자인 상형문자를 다룬 책도 나왔다.
고대 이집트의 언어 체계는 어땠을까. 통번역대학원 1학년생 유성환은 1997년 책을 통해서 우연히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접했다. 학창 시절 언어 감각이 있다고 생각하고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영문학과로 진학했고, 카투사로 군대를 다녀온 뒤에는 통번역사가 되고 싶어서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으로 진학한 그였다. 도대체 무엇을 묘사한 것인지 알 수도 없는 동물과 사물이 가득한 그림들. 사람과 동물, 새와 물고기, 각종 곤충과 식물, 토기와 칼⋯.
“고대 이집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집트 상형문자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습니다. 사람과 동물, 새와 물고기, 각종 곤충과 식물, 처음 봐서는 도대체 무엇을 묘사한 것인지 알 수도 없는 사물이 온전한 그림의 형태로 문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 경이로우면서도 그 원리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지요.”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한 뒤 계약직 통번역사로 활동하면서 아마존에서 책자를 사서 혼자 공부를 시작했고, 머지않아 문법도 공부하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어 문법을 공부하는 단계로 접어들자 또다시 놀랐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부터 수천 년 동안 사용되다가 약 1400년 전에 사멸한 고대 이집트어의 문법 체계가 현대어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복잡했다. 이때부터 문자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언어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낮에는 일터에서 주어진 통번역 일을 했고 저녁에는 아마존에서 구매한 문법책을 공부했다.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연습장에 필사해 나가는 생활이 5년간 이어졌다. 어느 순간 독학으로 돌파할 수 없는 한계에 맞닥뜨렸다.
“고대 이집트어 텍스트를 읽어야 되는데 못하겠더라고요. 혼자 텍스트를 읽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고 정확하게 읽고 있는지 확인도 받아야 되는데, 국내에선 해줄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고민을 했지요.”
마침 EBS에서 다큐멘터리 「문자」를 보고 진행자였던 배철현 당시 세종대 교양학부 교수에게 이메일을 보내 자문을 구한 뒤 이집트학을 전공하는 학자가 되리라 결심했다. 2005년 가을부터 미국 브라운대 석박사 통합과정에 진학, 이집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 문헌학자 유성환 박사의 원점이었다.
1970년 부산에서 사업하는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유성환은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매력에 빠진 뒤 전문 통번역사에서 이집트학으로 선회, 2012년 미국 브라운대에서 고대 이집트 문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고대 이집트의 고전을 번역하고 문헌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고, 2013년부터 서울대 인문대에서 고대 이집트학을 가르치는 한편, 책 『고대 중근동 팬데믹』 등을 저술했다. 한국고대근동학회 학술이사로 활동 중이다.
―앞으로 꿈이나 포부는 무엇인지.
“고대 이집트 고전 문헌을 표준이 될 수 있는 번역으로 출간해 내고 싶다. 이번에 『시누헤 이야기』가 잘 되면 다른 작품들을 후속으로 완역해보고 싶다. 지금 염두에 두고 있는 작품들이 몇 개 있다. 궁극적인 목표는 고대 이집트 문학 전집이나 고전 문집을 내는 것이다. 저도 더 공부를 해야 하고 작업도 더 해야 한다. 아마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고대 이집트 고전이나 지혜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인공지능(AI)을 비롯해 하루가 다르게 새 기술이 등장하고 있다. 이때 가장 흔들리는 것은 바로 인간성이다. 도대체 인간성의 핵심은 무엇인가. 고대 이집트 고전들은 인류가 막 문명을 시작했을 때 쓰인 작품으로, 이런 작품을 읽으면 우리가 지금 얼마나 다른 환경에서 사는지를 깨닫는 동시에, 인간성이라는 게 얼마나 변하지 않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고전을 읽으면서 인간성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한번 고민하고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 하는 미래는 어디에서 왔는지 그 출발점으로 한번 돌아가 보면 보일 수 있다.”
이집트 고문헌학자의 답변은 막힘이 없었고, 대답은 어떤 이야기의 숲으로 자주 내달리곤 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숲으로 부지런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 아늑한 곳에 다다른 느낌이 들곤 했다.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고대 이집트의 그곳. 거대한 피라미드가 규모를 뽐내고, 파라오의 스핑크스는 인상을 찡그렸으며, 천에 감겨 있던 미이라는 갑자기 관 뚜껑을 열고....
그러니까 그는 강의가 없는 날이면 오전 8시쯤 일어나서 집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의 공유 오피스로 간 뒤 책 속으로 들어가거나, 논문이나 새 책을 저술하거나, 고전을 번역한다. 아침부터 밤 10시, 11시까지. 저녁 무렵 근처 공원에서 만보씩 걷겠지만, 그럼에도 외부 일정을 최소화하고 연구와 저술, 강의의 본업에 매진할 것이다. 우직하고 단조롭게, 꾸준히, 샛길로 빠지지 않고. 그리하여 조용히 기쁘게 만날 것이다.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마음을. 아직 레반트 지역에서 돌아오지 못한 머리가 희어진 시누헤의 기도를.
“이 도주를 결정하신 신이 누구시든, 만족하시고 저를 고국으로 보내주소서. 어쩌면 제 심장이 온종일 머무는 곳으로 저를 보내주시겠지요. 저를 낳으신 땅에 제 시신이 묻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70쪽)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허정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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