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 포스트 진실(Post-Truth)의 시대, 민주주의와 시민

2024. 6. 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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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엽 대전대학교 군사학과 교수

22대 국회가 개원하고 미래가 시작됐다. 22대 국회는 4년의 임기를 넘어 미래를 결단하는 정치권력을 위임받았다. 그러나, 22대 국회의 결단으로 만들어질 미래에 안심하는 국민은 많지 않다. 임기가 3년이나 남은 집권여당이 중간평가를 겸한 총선에서 참패한 것은 민주화 이후 처음이다. 유권자의 67%인 2966만명이 투표에 참여한 가운데 여당과 야당은 지역구에서 각각 45.0% (1318만표)와 55.0% (1478만표)를 득표했지만 국회의석은 108석(36%)과 192석(67%)으로 과소과잉 대표되었다. 더구나, 22대 총선 이후 윤석열 정부에 대한 지지율은 20% 초반으로 하락했다. 여당과 야당에 대한 지지율은 30% 전후로 큰 차이가 없지만 과반수 다수의석을 차지한 야당이 주도하는 입법부와 행정부의 정치갈등은 익숙한 미래다.

여소야대의 분점정부에 더해 가짜뉴스로 점철되고 있는 정치갈등 역시 미래가 위임된 22대 국회에 대한 우려를 더한다. 22대 국회의원 선거의 쟁점은 정책이 아니라 가짜뉴스였다. 선거기간 중 공직선거법 위반혐의로 1681명이 입건된 가운데 허위사실 유포로 입건된 선거사범은 669명으로 21대 총선보다 2배로 증가했다. 물론 가짜뉴스는 선거에서 낮선 문제가 아니다. 전 세계 인구의 42억명, GDP의 42%를 차지하는 국가에서 선거가 치러지는 2024년, 진실을 가장한 가짜, 가짜로 폄훼된 진실 사이의 '포스트 진실(post-truth)' 논쟁이 보편화됐다.

'포스트 진실'은 1992년 스티브 테시치(Stve Tesich)가 '탈(de)진실'의 의미로 처음 사용했다. 워터 게이트, 이란·콘트라 스캔들과 같이 민주적인 사기꾼이 가져온 충격에 대중과 언론은 불편한 진실을 외면함으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보호했다. 이후 포스트 진실의 문제가 보편적인 화두가 된 것은 영국의 블랙시트(BREXIT)와 클린턴-트럼프의 대선이 치러진 2016년 BBC가 포스트 진실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하면서다. BBC는 포스트 진실을 '객관적 사실보다 개인적 감정과 믿음이 사회적인 여론형성에 영향력이 큰 현상'으로 정의했다. 승리가 예상되었던 힐러리 클린턴이 패배하고, 불가능 할 것으로 여겨졌던 영국의 EU탈퇴는 언론의 실패이기도 했다. 미국 대선 직후 폴리티코 편집장인 수잔 글레서는 한 기고문에서 '미디어 스캔들'이라고 까지 개탄했다. 언론이 사실이라고 보도한 것이 유권자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었던 언론이 위기를 맞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아닌 기술에 있다. 인쇄술이 중세를 붕괴시켰던 것처럼 정보기술이 정보독점을 해소하고 민주주의의 도구가 될 것이라는 전망은 현실과 달라졌다. 누구나가 되고 누구나 해설자가 되면서 언론권력은 해체되었지만 오히려 선택적인 정보감옥에 갖히게 되었다. 폐쇄적 네트워크로 연결된 시민은 자신의 신념에 일치하는 정보에만 집중하는 반향실 효과(echo chamber effect)에 전염됐다. 더구나, 엄지의 법칙(rule of thumb)과 인공지능의 합작품인 필터버블은 집단적인 확증편향을 강화시킨다.

그러나, 진실이 사라진 시대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포스트 진실의 문제는 'POST'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따라 중의적이다. 거짓, 선동에 대한 착각이 초래한 정치적인 혼란은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새롭게 알게된 것과 이미 알고 있는 것 사이이 인지부조화는 인간의 본질적인 한계다. 집단동조와 확증편향, 이로 인한 잘못된 판단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일반적이다. 그러니, 서로다른 정보가 선택적으로 수용되는 현실의 문제는 '탈진실'이 아니라 '후기 진실'로 정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누구나가 되고, 누구나 정보를 소비할 수 있는 현재의 정치담론은 구심력이 아니라 원심력, 진리의 단수성이 아닌 복수성, 이에따라 정치논쟁 역시 질서(cosmos)가 아니라 혼돈(chaos)이 더 힘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너도 옳고, 나도 옳고, 우리 모두 옳다는 진실 다원주의에 당황할 필요는 없다. 정치권력과 시민 간의 정보비대칭이 권위주의를 무기가 되지 않았던가. 오히려 진실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것이 정치의 과제가 되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집착이나 기계적 중립성도 정치 양극화를 악화시킬 뿐이다. 사실과 주장, 정보와 오락, 진실과 과장이 혼재하는 정치담론에서 비판적 리터러시를 가진 시민이, 민주주의를 성숙시켜 온 과거처럼, 후기 진실사회의 민주주의의 주역이다. '정치적 진실'에 합의하고 이를 민주주의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에게 달려있다. 윤대엽 대전대학교 군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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