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피겔〉 기자는 왜 ‘진보적 신조어’를 경계할까

이상원 기자 2024. 6. 5.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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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 포퓰리스트만큼이나 독단적 좌파도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르네 피스터는 ‘나쁜’ 말이나 사람, 생각을 공론장에서 몰아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슈피겔> 워싱턴 지국장으로 일하는 르네 피스터 기자가 <잘못된 단어>를 펴냈다. ⓒ르네 피스터 제공

라틴엑스(Latinx)라는 말이 있다. 미국 진보세력이 라틴아메리카계 미국인을 부르는 말이다. 이 신조어는 ‘젠더 감수성’의 산물이다. 표준어 ‘라티노(Latino)/라티나(Latina)’가 성별을 구분 짓고 양성 이외의 성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지적에 따라, 미지수 ‘x’를 넣었다. 젠더 감수성을 중시하는 미국 민주당 정치인 대부분이 이 용어를 쓴다. 그런데 라틴계 주민은 단 3%만 스스로 라틴엑스라고 칭한다. 2020년 대선에서 이들 중 38%가 ‘인종 갈라치기’를 일삼는다고 비판받은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4년 전 대선보다 10%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이안 부루마의 사례도 보자. 네덜란드 출신 작가이자 역사학자인 그는 2017년 〈뉴욕 리뷰 오브 북스(NYRB)〉 편집장이 되었다. 이듬해 〈NYRB〉는 성범죄 혐의로 기소된 유명 연예인 지안 고메시의 에세이를 싣는다. 여성 20명 이상이 고메시에게 성범죄를 당했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2016년 무죄판결을 내렸다. 활동가들은 〈NYRB〉를 거세게 비판했다. 파렴치한에게 지면을 내주었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성취인 미투 운동을 모독했다’는 비판이 〈가디언〉에 실렸다. 부루마는 “내가 아는 건 그가 법정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사회적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면 그게 얼마나 지속되고,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 등이 내 관심사였다”라고 해명했다. 인터뷰는 온라인상에서 더욱 큰 반발을 불렀고, 부루마는 경질됐다. 학자 100명 이상이 부루마 경질이 표현의 자유를 해친다는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르네 피스터가 책 〈잘못된 단어〉(문예출판사)에서 꼽은 사례들이다. 2004년부터 독일 언론 〈슈피겔〉에서 일한 르네 피스터는 2019년 워싱턴 지국장으로 발령받은 뒤 트럼프와 공화당, 미국 우파가 미국 민주주의에 끼치는 악영향을 여러 차례 보도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피스터는 우파 포퓰리스트가 유발하는 것 외의 새로운 위협도 발견했다고 적었다. 정치권과 언론은 대중이 거부하는 용어를 고집하고, 특정 의견을 소개했다는 이유만으로 학자와 언론인이 직장을 잃는다. 피스터는 책에 이렇게 썼다. “인종차별 반대, 평등, 소수자 보호라는 이름으로, 표현의 자유와 법 앞의 평등, 피부색과 성별에 따른 차별 금지 등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려는 독단적 좌파가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르네 피스터를 서면 인터뷰했다. 그는 소수자 보호가 의심할 나위 없이 중요한 가치이며,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이나 정체성 정치가 사회변혁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그가 여기에 맞서 변호하려는 건 ‘라티노’라는 오래된 호칭이나 유명 성범죄 혐의자, 1980년대 동성혼을 반대했던 정치인이나 우생학적 주장을 펼친 학자가 아니다. ‘표현의 자유’다. 그는 ‘나쁜’ 말이나 사람, 생각을 공론장에서 몰아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모두 자유롭게 제 의견을 밝혀야 진정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고, 그게 사회 진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언론의 역할은 이 토양을 만드는 데 있다고 피스터는 말했다.

2020년 8월18일 애리조나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선후보의 유세 현장에서 한 지지자가 ‘트럼프를 지지하는 라티노’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있다. ⓒAP Photo

정치적 올바름이나 ‘미세 공격(Microaggression, 의도하지 않았지만 소수자가 모욕감을 느끼게 만든 언행)’ 같은 주제가 어떻게 유행이 되었나?

사회활동가들이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맞서고자 하는 진심 어린 열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조리를 고치는 데 자유민주주의 헌정 체제가 너무 느리게 작동한다고 본다. 유럽보다 미국에서 이런 생각이 더 퍼졌다. 그 이유는 과거 노예제와 1960년대 민권법 제정 후에도 근절하지 못한 인종차별 때문이다. 사회활동가들은 법 앞의 평등이나 표현의 자유가 해결책이 아니라 사실 ‘문제’의 일부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논쟁적 사안을 공개적으로 논의하지 않으면 결국 우파 포퓰리즘만 이득을 본다. 단기적으로는 특정 견해를 밀어붙여 목적을 달성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자기의 분노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더라도 사람이 투표로 그것을 표현할 기회가 있다.

용어 수정은 대개 나름의 정당성을 갖고 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처럼 이 시도가 대중적으로 정착되면 바람직한 일 아닌가?

언어가 (옳은 방향으로) 변하고 차별적 용어 사용이 금지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정치권과 언론에서 라틴엑스와 같은 표현을 쓸 때 라틴아메리카계 미국인의 90% 이상은 이 말을 거부한다. 이들은 빠르게 냉담해지고, 사람들은 점차 정치권과 언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피스터는 진보적 신조어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다. 책 전반에서 그는 특정 단어와 담론의 옳고 그름보다 효용에 더 집중한다. 정당이나 활동가가 신조어로 ‘보호’하려는 소수자 대부분은 최신 진보 담론에 무관심하고 더러는 거부감을 보인다. 더 나아가 자신들이 멸시받고 소외되어 있다고 여기는 이들은 운동에 대한 지지를 거둔다.

활동가들의 압력 없이는 여성과 소수인종이 고위직에 진출하기 어렵다. 변화의 과정에서 일각의 거부감은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이 리더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당연히 큰 성공이다. 이러한 평등을 위한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차별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모두의 의견을 듣는 게 중요하다. ‘주변화된 목소리만’ 중요시하라는 요구는 민주주의에 해롭다고 생각한다. 수십 년 이상 소외되어온 이들의 소리를 전달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 하지만 사회 진보는 모두가 (논의 과정에) 참여했고, 포용되었다고 느낄 때에야 비로소 성공한다. 낡은 차별을 새로운 차별로 대체한다고 해서 곧장 더 나은 사회가 되지는 않는다.

토론을 거부하는 세태를 지적했다. ‘언론은 대의에 복무해야 한다’ ‘보수적 생각은 들을 필요가 없다’는 일각의 언론관도 등장했는데.

특히 미국 언론은 시청자(독자)에게 맞춰 정치적 입장을 조정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적으로 좌파인 MSNBC 채널과 우파인 폭스뉴스 채널을 매일 저녁 돌려가며 보면 두 매체가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도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제 미국에서는 ‘언론의 객관성’이라는 덕목 자체가 구시대의 산물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매우 우려스럽다. 비즈니스 측면에서 보면 이쪽이 더 옳은 결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는 몹시 해롭다.

차별 문제나 정체성 정치를 두고 언론사 내부에서도 갈등이 벌어진다. 새로운 현상인가?

언론인들이 중도적 입장에서 이탈하는 건 새롭지 않고, 설명하기도 쉽다. 언론계로 진출하려는 이는 누구나 로펌 또는 대기업에 비해 잠재적 수입이 낮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이 직업에 종사하려는 이유는 권력자를 감시하고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서다. 여기까지는 잘못된 게 없다. 문제는 사회운동과 저널리즘 사이에 더 이상 경계선을 긋지 않을 때 생긴다. 누구도 완전히 객관적이지 않으며 언론인도 각자의 신념과 견해를 갖는다. 그러나 최소한 어떤 일을 공정하고 객관적인 것으로 묘사하고자 노력은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업의 신뢰도가 손상된다.

2021년 5월23일 백인 경찰의 폭력으로 숨진 조지 플로이드 1주기를 앞두고 시민들이 뉴욕 브루클린.ⓒAP Photo

책에서 정체성 정치의 논리에 종교적 성격이 있다고 썼다. 논리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종교의 형태를 택했다고 보나? 아니면 진정 종교적 공리라고 믿기에 토론이 불필요하다고 믿는 것인가?

일군의 새로운 좌파를 신종 종교라고 쓴 것은 논란이 많은 구절 중 하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말 비슷한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예컨대 ‘백인 특권’이라는 명목으로 돌아오는 원죄 사상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이건 도저히 뿌리 뽑을 수 없고, 오로지 끝없는 회개와 자아 성찰을 통해 최소화될 따름이다. 다수 미국 기업이 반인종차별 훈련 코스를 도입했고 독일에서도 점점 인기를 얻는다. 이 과정은 관찰할수록 놀라울 정도로 (종교적) 영성 탐구 과정과 닮았다. 신자들이 내면의 도덕성을 바라보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피스터가 모든 정체성 정치, 반차별 운동을 종교적이라고 묘사하지는 않는다. 실제 종교 경전의 문법을 따온 교재와, ‘고해’ 과정을 닮은 수련법을 담은 반차별 교육 상품이 팔리고 있다. 피스터가 꼽은 예시는 미국 역사학자 이브람 켄디의 프로그램이다. 켄디는 자신의 책에서 ‘인종차별주의의 맥박은 부인( denial) ’이라고 말한다. 인종 차별주의자만이 스스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부정한다는 것이다.

어떤 활동가들은 자신의 주장이 학문적으로 합의된 바이며, 여기 무지한 이들이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생각이 많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특정 견해가 ‘전문가 의견’이며, 과학적 합의가 끝나 반대할 수 없다는 논리가 제시되는 모습을 본다. 위험한 일이다. 이런 주장 다수는 예컨대 ‘반인종차별주의’ 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는데, 뜯어보면 개인이 동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정치적 견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의 산물이 전혀 아니다. 과학에 사회운동을 뒤섞는 건 저널리즘과 사회운동을 혼합하는 것 못지않게 과학에 해가 된다.

혐오 발언 처벌은 표현의 자유를 해치는가? 홀로코스트 왜곡 처벌법 통과 당시 독일 여론은 어땠나?

혐오 발언 논쟁은 몹시 복잡하다. 독일처럼 홀로코스트 부정 발언을 법적으로 처벌한다면 누군가는 그게 표현의 자유 제한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나는 독일 역사를 돌아보면 그게 이해할 만한 정치적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혐오 발언의 범주가 점차 확장된다면 당연히 위험하다. 일례를 들자면 사회운동가 다수는 이미 ‘누군가 생물학적 성별이 남성과 여성 둘이라는 견해를 내보인다면 곧 혐오 발언’이라고 주장한다. 트랜스젠더가 존재할 권한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게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다.

여론 양극화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남북전쟁 이전 미국처럼 한쪽의 아이디어가 매우 뒤처졌거나 합의 불가능한 지점이 있다면, 공개적 논쟁은 불필요한 것 아닌가?

물론 이념적 갈등은 언제나 존재했고 개중에는 합의 불가능한 것도 있었다. 그럼에도 내 책은 자유주의 원칙을 지켜내고 공개적 담론의 힘을 믿자고 호소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아군과 적군이 타협 없이 승리 아니면 패배만 두고 겨루는 전장으로 사회를 바라본다면? 특히 독일 역사가 그 결말이 얼마나 나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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