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기억 지우고도 싶었지만, 누군가는 가야 했던 곳” [심층기획-사라져가는 美 6·25 참전영웅들]

박영준 2024. 6. 5.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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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앞두고 찾은 KWVA 312지부
평균 92세 노병… “6·25참전은 자랑”
매달 한번 정기모임…“전우애 여전”
잡채·치킨… 오찬 ‘한·미 동맹’ 닮아
“산산조각 났던 韓, 이젠 가장 발전”
참전 미군 2023년 78만명 생존 추정
이 추세라면 15년 후 아무도 안 남아
호건 前주지사 부인 “예우 노력해야”
“우리는 지난달에 2명의 회원을 잃었습니다.”

한국전 참전용사협회(KWVA) 312지부 지부장 론 트웬티(88)는 회원들 얘기를 하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2007년 메릴랜드주 워싱턴카운티를 중심으로 6·25전쟁 참전용사 35명이 모여 결성한 312지부는 2013년 회원이 120명까지 늘었다가 하나둘 세상을 떠나며 현재는 35명으로 줄었다. 매달 정기 모임에 참석하는 회원은 15명 남짓, 평균 나이는 92세다. 그나마도 312지부는 메릴랜드주에서 유일하게 남은 참전용사 지부다.

미국의 ‘6·25 영웅’들이 급격히 줄고 있다.

미 보훈부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기준 미국의 6·25전쟁 생존자는 78만3000여명으로 추정된다. 2000년 392만명에서 5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보훈부는 2025년에는 54만9000여명, 2040년에는 4600여명, 2050년에는 10여명의 참전용사만 생존할 것으로 추정했다. 앞으로 약 15년 후에는 미국 내 6·25전쟁 참전용사가 자취를 감추게 되는 셈이다. 2020년 기준으로 6·25전쟁 참전용사의 평균나이는 88세로 집계됐다.

미 국방부에 따르면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680만명의 미군이 참전하거나 한국에서 복무했다. 5만4200여명의 미군이 목숨을 잃었고, 10만3200여명이 다쳤다. 670만명이 전쟁의 기억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지난 1일 메릴랜드주 헤이거스타운의 유일한 한인교회에서 6·25전쟁 참전용사 초청 오찬 행사가 열렸다. 미국의 현충일 격인 메모리얼데이 주간을 계기로 10년째 이어지고 있는 행사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참전용사는 12명뿐이었다. 기자가 2022년 행사를 방문했을 당시 참석했던 참전용사 8명이 올해는 참석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세상을 떠났고, 누군가는 몸이 아파 참석하지 못했다고 했다.
행사는 참전용사들에 대한 감사인사를 시작으로 그들을 위한 기도와 찬송이 이어졌다. 점심은 한·미동맹처럼 밥과 빵, 불고기와 치킨, 잡채와 마카로니, 김치와 샐러드로 차려졌다. 잡채와 불고기가 가장 먼저 동났다. 2018년 2019년만 해도 예배당이 좁아 야외에서 단체 사진을 촬영했지만 이날은 참석인원이 줄어 예배당에서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1928년 8월생으로 1951년 1월부터 1952년 가을까지 6·25전쟁에 참전한 짐 메이휴(95)는 “나는 장애가 있고,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기억도 모두 잊었다”며 인터뷰를 사양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일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이동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군목 보조로 참전한 그는 “중공군이 우리 부대를 침공했다. 나는 최대한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시체가 널려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한때는 전쟁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했지만, 누군가는 그곳에 가야 했고 나는 내가 한 일이 자랑스럽다”면서 “우리는 한국에서 많은 사람을 구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전쟁에서 어떤 훈장을 받았느냐고 묻는데 나의 훈장은 내 가슴속에 있다”고 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노병의 목소리는 떨렸다.

1950년 11월부터 1952년 9월까지 김포와 영등포, 오산 공군 기지에서 복무한 칼 조지 페일러(94)는 “한국전쟁은 잊힌 전쟁이 아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1일(현지시간) 론 트웬티 한국전 참전용사협회 312지부 지부장(앞줄 오른쪽 두번째)과 6·25전쟁 참전용사들, 유미 호건 여사(앞줄 오른쪽 네번째), 윤치현 목사(뒷줄 왼쪽) 등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 공군으로 괌에서 복무한 어니스트 브랜트(94)는 말소리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6·25전쟁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냐고 목소리를 높여 묻자 “나와 같은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전우와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자신이 결혼할 여자친구와 부모님에 대해 이야기하며 미국에 돌아갈 생각에 들떠 있었다”며 “다음날 중공군의 침공이 있었고, 그 친구는 돌아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1954년 9월부터 1955년 10월까지 오산에서 나팔수와 행정병으로 복무한 샘 울콕(87)도 한국을 분명히 기억했다. 그는 “한국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고, 여기저기 고아들이 있었다”며 “우리 막사 일을 보던 문범식이라는 착한 소년이 아직 기억난다”고 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래리 호건 전 메릴랜드 주지사의 아내 한국계 유미 호건 여사는 “그분들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우리가 그분들을 더 챙길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헤이거스타운=글·사진 박영준 특파원 yj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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