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속성 강화" 기대감 속…"보완책 필요" 목소리도
500억원 이상 R&D(연구·개발) 사업에 적용했던 '예비타당성조사(이하 예타)'가 폐지된다. 대신 1000억원 이상 규모 사업에만 '사전 전문검토'와 '맞춤형 심사제도'를 도입한다. 상시 진행으로 통과까지 평균 3년이 소요되던 예타와 달리 사전 전문검토는 전년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5개월간 심사한다. R&D 사업을 진행하는 부처의 자율성과 책임을 높이면서 사업 속도는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와 기획재정부(기재부)는 4일 'R&D 예타 폐지'에 대한 세부 추진방안으로서 '대형 국가연구개발사업 투자·관리 시스템 혁신방안'을 제8회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회의에서 최종의결했다.
류광준 과기정통부 혁신본부장은 "이를 통해 500억~1000억원 규모의 신규사업 착수는 예타 폐지 전보다 약 2년 이상 단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1000억원 이상의 기초·원천연구, 국제공동연구 등 '연구형 R&D 사업'은 '사전 전문검토'를 실시한다. 사전 전문검토는 예산요구 전년도 10월에 사업추진계획을 미리 제출 받아 민간 전문가들이 이듬해 3월 결과를 각 부처에 통보한다. 사전 전문검토에서는 예타 제도와 같은 신규 R&D 사업의 당락결정이 아닌, 기획 완성도를 제고하는 방향으로 추진한다. 각 부처는 이를 바탕으로 기획을 보완해 차년도 예산을 요구하게 된다.
1000억원 이상의 '연구시설구축'이나 '체계개발사업'은 '맞춤형 심사제도'를 거쳐야 한다. 맞춤형 심사제도는 내실 있는 사업 추진과 재정건전성 확보에 초점을 맞춰 사업 유형과 관리 난이도에 따라 서로 다른 절차를 적용한다.
별도 기술개발이 필요없고, 사업관리도가 낮은 단순 '연구장비도입 및 공간조성형 사업'은 필요성·활용계획·추진전략을 중심으로 사업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신속하게 사업 추진 여부를 결정한다.
기술개발이 수반되며 사업관리 난이도가 높은 입자 가속기 등 '대형연구시설구축'이나 위성·발사체 등의 '체계개발사업'은 추진 필요성 검토를 통해 구축 여부를 결정하는 '기본계획심사'와 사업 준비정도 검토를 통해 사업 착수 여부 및 예산투자 규모를 결정하는 '추진계획심사'를 단계적으로 실시한다.
대규모 예산투자의 위험성을 낮추기 위해 연구 시설 구축·체계개발에 필요한 선행기술개발은 기본계획심사 전 별도의 '연구형 R&D'로 나눠 먼저 추진할 예정이다.
과기정통부가 3월에 전문검토와 추진계획심사 결과를 전달하면, 각 부처는 4월말까지 모든 R&D사업을 지출한도 내에서 부처 우선순위에 따라 자율적으로 조정해 차년도 예산 요구를 한다. 이를 통해 재정건전성을 높이고 각 부처의 책임성도 강화한다는 취지다.
류 본부장은 "각 부처가 자신들의 지출 한도 내에서 R&D 사업 기획을 해오라는 의미인데, 이렇게 되면 부처 내에서 어느 정도 기획이 무르익어 자신 있는 상태에서만 (전문검토나 심사를 받으러) 오게 될 것"이라며 "부처의 자율성과 그에 비례해 책임도 높아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과기정통부 혁신본부와 기재부는 매년 예산심의 단계에서 사업수행 건전성을 지속 점검·관리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견된 사업은 특정평가 등을 통해 지속여부·적정규모 등을 검토하고 문제 사업은 종료시키는 등 사후관리도 강화할 예정이다.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이번 R&D 예타 폐지가 실제 적용되기 위해서는 '국가재정법' 개정이 선행돼야 한다"며 "글로벌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국회에서 초당적인 지원을 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고 했다. 이어 "법 개정 전까지는 기존 예타보다 단축된 '패스트트랙(Fast Track)', '혁신·도전형 R&D 사업들에 대한 예타 면제범위 확대' 등을 통해 국가 정책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R&D 사업들이 신속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신속한 R&D 위해 '예타 폐지' 한다지만...과학계 '갸웃'
정부가 4일 1000억원 미만의 신규 과학기술 R&D(연구·개발) 사업에 대해 예비타당성조사(이하 예타)를 면제한다는 방침을 내놓은 것과 관련 과학기술계에서는 "신속한 추진을 요구하는 R&D에 필요했던 변화"라면서도 "후속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평이 나온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기획재정부는 4일 열린 제8회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회의에서 1000억원 미만의 R&D 사업에 대해 예타를 폐지하는 안을 골자로 한 '대형 국가연구개발사업 투자·관리 시스템 혁신방안'을 최종 의결했다.
R&D 예타 제도는 대규모 국가 재정을 투입하기 전 연구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2008년 도입됐다. 하지만 기획부터 예타 통과까지 평균 3년 이상 소요되며 전 세계적인 기술개발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실제 양자컴퓨터·통신·센서 시장에서 선도 기술을 확보한다는 목표로 수립된 약 1조원 규모의 '양자과학기술 플래그쉽 프로젝트 사업'의 경우 기획 기간을 거쳐 지난해 4월 예타조사 대상 사업으로 선정됐지만,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아 R&D 착수조차 하지 못한 상태다. 평가 기간에만 약 1년, 사전 기획에 든 시간까지 합치면 2년에 이른다는 게 프로젝트 관계자의 설명이다.
자율주행 기술 개발 혁신사업의 경우에도 2년여에 걸친 조사 끝에 고배를 마신 뒤 2021년 두 번째 예타 조사에 통과했다. 당시 연구개발 계획 수립에 참여한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책임연구원은 "조사에 2년이 걸리면 예타에 통과하더라도 연구계획서 작성 당시 세운 목표가 그 시점엔 이미 낡은 기술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과기정통부는 기존 500억원 이상 R&D 사업에 대해 실시하던 예타를 폐지할 경우, 500억~1000억원 규모의 신규사업은 예타 폐지 전보다 약 2년 이상 단축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1000억원 이상의 사업에 대해선 민간 전문가 중심의 사전 전문 검토를 실시한다. 예산안 편성 전년도 10월에 사업추진계획을 제출해 검토하고, 그 결과는 이듬해 3월에 각 담당 부처로 통보하는 방식이다. 각 부처는 검토 결과를 토대로 5월까지 예산안을 구체화한다.
이때 별도 기술개발이 필요하지 않은 연구 장비 도입이나 공간 조성형 사업은 신속하게 사업 추진 여부를 결정하고, 입자가속기 등 대형연구시설이나 위성 개발 등 체계개발사업은 단계적인 계획 심사를 거치는 등 과제의 성격에 따라 심사 과정을 세분화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소속의 한 연구자는 "예타를 통과한 과제는 이후 숫자 하나 못 바꾸게 돼 있었다"며 "과제 수행 중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일부 목표나 방향을 재설정할 수 있도록 유연성을 갖출 방안도 함께 논의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예타가 폐지된 만큼, 전문 검토 과정에선 과제의 주제를 잘 알고 있는 연구계 전문가가 개입할 수 있도록 상피제에 대한 보완도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상피제는 동일한 기관에 속하는 연구자의 평가 참여를 제한하는 제도다. 공정한 평가를 위해 도입됐지만, 특정 전공 등을 배제하다 보니 평가위원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소속 또 다른 연구자는 1000억원 이상 사업에 대해 적용하는 사전 전문검토제에 대해 "(예타를 거칠 경우) 1년 이상 걸리던 심의를 5개월 안에 끝낼 경우 시간은 단축되겠지만 거대 예산이 걸린 만큼 신중한 검토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빠르게 기술 개발에 착수해야 하는 연구가 있는가 하면, 긴 호흡이 필요한 연구도 있다"며 "예타 폐지로 기준이 완화되는 만큼 이를 악용하려는 시도가 발생하지 않도록 섬세한 정책 조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전했다.
정부는 예타 폐지 방안을 발표했지만, 아직 국가재정법 개정이라는 큰 산이 남아있다. 정부가 제출한 국가개정법 개정안이 이번 22대 국회에서 의결돼야 하므로, 실제 예타 폐지가 실현될 때까지는 시일이 걸릴 전망이다.
배한님 기자 bhn25@mt.co.kr 박건희 기자 wisse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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