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썬과 5·18, 세상을 바꾸는 자각 [뉴스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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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라는 자각, 구하라씨의 이 자각이 '버닝썬 게이트'의 실체를 밝히는 단초가 됐다.
구하라씨는 자신이 성범죄 피해자임을 자각하고 행동했던 것이다.
'나는 피해자'라는 자각엔 타인이 도저히 헤아리기 어려운 괴로움이 수반될 것이다.
더디게 느껴지더라도, 피해자들의 자각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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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라는 자각, 구하라씨의 이 자각이 ‘버닝썬 게이트’의 실체를 밝히는 단초가 됐다. ‘버닝썬’은 그룹 빅뱅의 전 멤버 승리(본명 이승현)가 만든 거대한 ‘성범죄 공화국’이었다. 드러난 가해자들의 소행은 사람의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 그들은 ‘물뽕’(마약)과 불법 촬영을 동원해 여성들을 성 노리개로 삼았다. 이 범죄 집단이 버젓할 수 있었던 배경엔 경찰의 비호가 있었다는 의혹을 풀 결정적인 도움을 구하라씨가 줬다. 생전 그는 이 사건을 추적한 강경윤 SBS 기자에게 “돕고 싶다”며 이런 얘기를 했다.
“저도 ‘리벤지 포르노’ 피해자잖아요.”
강 기자가 BBC의 다큐멘터리 ‘버닝썬 : K팝 스타들의 비밀 대화방을 폭로하다’에 출연해 이 말을 전했다. ‘리벤지 포르노’는 헤어진 연인에게 보복하려고 유포하는 성적인 사진이나 영상을 말한다. 구하라씨는 자신이 성범죄 피해자임을 자각하고 행동했던 것이다. 같은 범죄가 일어나선 안 된다는 의지에서였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벌어진 국가 성폭력의 실체 또한 처참한 자각으로부터 드러났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발간한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사건 보고서’엔 차마 제대로 읽기 힘든 피해 진술이 기록돼 있다. 인면수심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수사관은 가족의 행방을 밝힐 것을 요구하며 수사실에서 강간했다. 원하는 답변을 하지 않자 다른 수사관이 강간하겠다고 협박해 원하는 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한 피해자는 도대체 어떤 세월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을까. 자책과 수치심, 국가(계엄군·수사관)에 당했다는 두려움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 이런 단어로 쉽게 압축할 수 없는 고통일 테다.
위원회가 40년 만에 이 잔인한 폭력의 진상에 다가갈 수 있었던 건 피해자 19명의 진술 덕분이다. 2018년 먼저 나선 김선옥씨의 증언을 보고 용기를 낸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김씨에겐 서지현 검사의 ‘미투’가 힘이 됐다. 수치심을 느껴야 할 장본인은 내가 아닌 가해자, 내가 당한 건 폭력이자 범죄라는 자각이 또 다른 자각을 불렀고, 서로의 용기가 된 것이다.
BBC의 다큐엔 용기 있는 피해자가 한 명 더 등장한다. 그는 ‘버닝썬’에서 자신 모르게 약을 탄 술을 마신 뒤 끌려가 성폭력을 당한 것으로 의심된다. 무릎 꿇고 ‘살려 달라’고 울며 비는 그에게 가해자는 “웃으라”며 카메라를 들이댔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가해자는 사진을 내밀며 “합의하에 한 성관계”라고 주장했다.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 나는 그 사건을 그가 잊지 않고 말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우리 사회가) 알고 있어야 하니까, 그래야 피해자가 더 발생하지 않을 거 같으니까.”
‘나는 피해자’라는 자각엔 타인이 도저히 헤아리기 어려운 괴로움이 수반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그 고통의 산을 넘은 이유는 ‘더 이상 이런 일이 벌어져선 안 된다’는 절실함에서다.
가해자들도 죄책감을 자각하고 있을까. 통탄스럽게도 ‘버닝썬’ 가해자들의 행보를 보면 언감생심인 듯하다. 5·18 사건 가해자 중에서도 범죄를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한 이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도 이 믿음은 저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더디게 느껴지더라도, 피해자들의 자각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것. 잊지 말아야 할 게 또 있다. 우리 모두 그 자각에 빚졌다는 사실 말이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52710400005731)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52814410000239)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53011110000036)
김지은 버티컬콘텐츠팀장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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