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길산' 원고, 대충 쓰느니 펑크 내라더라"...한국일보와 함께한 황석영의 반세기[특별 인터뷰]
50년 쌓아 온 한국일보와 문학적 인연
‘장길산’ 이어 4편의 소설 신문서 연재
“한국일보는 내 친정…문예부흥 했으면”
편집자주
한국일보는 1954년 창간하며 염상섭의 ‘미망인’을 연재한 것을 시작으로 문학과 함께 걸어왔습니다. 1955년 이후 신춘문예로 수많은 문인들에게 길을 열어줬고 1969년 제정한 한국일보문학상(옛 한국창작문학상)으로 매년 그 시대 가장 빛나는 소설가를 상찬했습니다. 한국문학의 기록자이자 동반자의 역할을 한 한국일보가 귀한 글로 신문을 빛내준 문우(文友)들과 창간 70주년의 기쁨을 나눕니다.
1974년 서른두 살의 청년 소설가 황석영이 한국일보의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사옥을 찾았다. “신인 중의 신인”이었던 그가 차기작으로 준비하던 소설 ‘장길산’의 신문 연재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높은 사람이건 나이 든 사람이건 거의 어려워하지 않았다”는 패기만만했던 황 작가는 한국일보 장기영 당시 사주에게 거침없이 말했다. “최고의 원고료를 주면 하겠습니다.”
창간 20주년의, 역시나 패기만만한 신문이었던 한국일보는 ‘집 반 채’ 값을 자료 조사비로 황 작가에게 그 자리에서 내줬다. 1974년 7월 11일부터 1984년 7월 5일까지 10년 동안 2,092회나 연재된, 해방 이후 최고의 역사소설이라 불리는 ‘장길산’은 그렇게 시작됐다. "3년도 대단하다"고 잡았던 연재 기간이 10년으로 늘어날 거라는 건 황 작가도 한국일보도 까맣게 몰랐다. 10년 연재는 한국 신문 역사에 유례없는 기록이다.
“‘장길산’을 쓴 10년은 제 하반기 문학의 ‘민담 리얼리즘’을 이루는 밑천이 됐습니다. 방북하고 감옥에서 나온 이후 ‘손님’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등 형식·서사적 실험을 거친 소설을 쓴 건 ‘장길산’이라는 과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것이죠. 한국일보에 장길산을 연재한 10년은 작가로서 수련 기간이기도 했고, 저를 성장시키는 시간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아주 귀중한 인연입니다.”
3일 전북 군산시에서 만난 황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에서 민초들의 일상을 복원해 민담이라는 한국만의 서사를 중심에 두겠다"는 의미로 황 작가가 자신의 문학을 정의한 ‘민담 리얼리즘’이 한국일보로부터 태동했다는 이야기다. 세계적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은 올해 황 작가의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를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에 올리며 이 개념을 언급하기도 했다. 여든두 살이 된 황 작가가 다리에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은 채로 창간 70주년 인터뷰에 나서 “한국일보는 내 친정”이라고 거듭 애착을 드러낸 것엔 이 같은 깊은 사연이 있다.
“젊은 작가들, 다들 한국일보 지면 탐냈다”
1974년 황 작가가 한국일보 사옥에서 나오자마자 ‘장길산’ 자료조사비 절반을 동료 문인들과 일주일간 술을 마시는 데 썼다는 건 문학계에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다. 무턱대고 또 돈을 요구하는 그에게 장기영 사주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이건 꼭 자료비로 쓰라”며 수표를 다시 끊어줬다면서 황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중산층과 젊은 독자들이 전부 한국일보를 좋아했지요. 주간지였던 ‘주간 한국’도 흥미 위주의 다른 주간지와 달리 문화지처럼 격이 아주 높았어요. 그러니 젊은 작가들은 다들 한국일보 지면을 탐냈습니다.”
황 작가는 '장길산'을 연재한 10년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풀어냈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는 그의 말처럼 한국일보는 거액의 자료비는 물론 사진기자에게 규장각의 관련 자료를 일일이 찍도록 했고, 운당여관 특실에 집필실을 잡아주기도 했다. 원고 ‘펑크’마저 용인했다. “대충 써서 실을 수도 있었지만, 글이 막히면 차라리 펑크를 내라고 하더라”고 그는 말했다.
한국일보 지면을 자유롭게 활주한 ‘장길산’은 황석영 문학의 토대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를 대중작가로 만든 작품이다. 1부 상·하권은 1976년 초판이 나온 지 20일 만에 매진됐다. 한국일보 기자들도 마감 시간에 인쇄 직전의 ‘장길산’ 교정지를 보러 몰려들었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더께 앉은 고전으로 남기보다는 널리 읽히고자 하는 작가의 뜻에 따라 영화, 드라마, 만화로도 만들어졌다. 김일성 주석을 비롯해 북한 인사들에게도 읽히면서 남북한 합작 영화 제작이 추진되기도 했다.
이야기가 풀리지 않으면 잠적해 버린 탓에 마감시간 전에 원고를 받아야 했던 기자들의 곤혹은 적지 않았다고 황 작가는 말을 이었다. 장기 연재 중단도 네 차례나 있었다. “(한국일보 기자였던) 김훈 작가가 초임 기자 때 제 원고를 맡았을 때가 있어요. 농담 삼아 지금도 ‘황 선배가 원고 갖고 속을 썩여서 차라리 내가 쓰고 말지 해서 작가가 됐다’고 해요.”
한국일보의 연재소설사, 한국문학사 됐다
‘장길산’ 이후로도 한국일보와 황 작가의 문학적 인연은 이어졌다. 이는 한국일보의 연재소설 역사를 한국문학사로 만들었다. 황해도 신천 양민 학살 사건을 꼭두각시놀음 형식으로 풀어내면서 민담 리얼리즘이 본격 개화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손님’(2000년 10월~2001년 3월)과 ‘심청, 연꽃의 길’(2002년 10월~2003년 10월) ‘여울물 소리’(2012년 4월~2012년 10월) 등 한국문학의 돌올한 명작들이 한국일보 지면에서 독자들과 만났다.
‘여울물 소리’는 황 작가의 마지막 신문 연재 소설이다. “당시엔 신문사가 한국 문학을 지원하고 책임진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어요. 일본 언론보다 한국이 오랫동안 이런 사명감을 유지했죠. 한국일보는 나를 위해 2000년대까지도 신문 소설 연재를 지켜냈어요. '여울물 소리’는 칠순을 기념해서 쓴 거거든요. 조선시대 이야기꾼인 전기수의 일생을 썼는데 그게 제 신문 연재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종이책보다 인터넷으로 글을 읽는 것이 익숙해진 시대에도 황 작가는 ‘장길산’을 위해 수고로움을 감내했던 무명의 독자들을 기억한다. “작가는 그가 다루려는 현실의 한복판에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전남 해남으로 떠났고, 활동가로 전국을 누빈 그다. 그런 황 작가를 대신해 고속버스 터미널, 기차역, 공항에서 수많은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서울의 한국일보사로 '장길산' 원고를 기꺼이 날라주었다. 이로 인해 ‘장길산’은 대장정을 무사히 마치고 황석영의 인생 자체가 될 수 있었다. 황 작가는 이들을 향한 존경과 애틋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부산, 광주뿐 아니라 제주까지 전국에서 서울로 간다는 사람을 잡아서 맡겼는데, 늦게 도착한 적은 있었지만 원고가 없어진 적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독자들, 말하자면 사람들이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했는지요. 그리고 신문 지면을 굉장히 존중했다는 것이죠. 죽기 전에 그런 잔치를 한 번 해봄 직도 해요. 한국일보하고 ‘그때 당시에 원고를 날랐던 사람들 전부 와라 모여라’ 해서 지금 어떻게들 지내시는지….”'
“나는 과거 아닌 지금도 현역이어야”
50년의 세월이 흘러 황 작가는 노년이 됐다. 1943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어머니 등에 업혀 38선을 넘은 그는 한국전쟁을 겪었고 베트남전에 참전했으며 1989년 방북 이후 미국 뉴욕과 독일 베를린 망명 생활을 했고 투옥되기도 했다. 한반도의 현대사와 치열하게 부대낀 그는 여전히 의욕에 가득 찬 채로 ‘내일’을 말했다.
“나는 과거의 사람이 아니고 지금도 현역이어야 하거든요. 지금도 새로 시작하는 사람이라고 여기려 해요. 원로 작가의 위기는 매너리즘이고 동어반복이죠. 똑같은 황석영이가 계속 연장되는 거예요. 그게 가장 큰 위기죠. 이번에 부커상을 받았다면 연설문을 '백척간두에서 진일보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 내가 그렇다. 내 문학이 그렇다' 이렇게 시작을 하려고 그랬죠.”
이처럼 백 척의 장대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황 작가의 문학은 그를 70대에 쓴 ‘철도원 삼대’로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게 했다. 만년에 쓴 ‘해 질 무렵’(2015)으로 1차 후보가 된 지 5년 만이다. ‘영원한 청년 작가’라는 수식어가 허명이 아님을 다시금 입증한 셈이다. 일찌감치 구상한 600년 된 나무 이야기인 ‘할매’ 등을 비롯한 차기작도 세 편 준비해 뒀다. “앞으로 쓸 작품에 굉장히 자신만만해요. 이전에는 쓰기 전에는 형식이 분명하지 않아 헤맸는데, 지금은 형식이 와 있어요. 서사무가의 형식으로 시적으로 풀어내려고 해요.”
“미디어는 한 시대와 독자, 기자가 같이 만들어간다”
평소 삶의 현장에 천착하면서 공사다망하기로 문단에서 첫손에 꼽히는 황 작가이지만, “집필을 시작하면 바깥일은 일절 금한 채 글을 쓴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생성형 인공지능(AI) 챗GPT를 ‘조수’로 들여 자료 요약 등에 도움을 받는다. 연말에는 차기작을 책으로 낼 예정이라면서 우스갯소리를 덧붙였다. “이게 미신인데 사주에 보면 ‘2세 운’ 이라 그래요. 12세 22세 32세 42세 이때 대운이 바뀌는데, 이제 82세니까 새로 시작되는 거지.” ‘장길산’도 서른둘에 시작해 마흔둘에 끝났으니, 여기에 들어맞는다.
황 작가는 한국일보에 말했다. “신문사가 말초적이거나 자극적인 기삿거리로 밥거리를 만들기보다는 인터넷을 문예적으로 품격 있게 꾸미면서 젊은 사람들과 여러 가지 미디어 실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종래의 정치에 함몰돼 끌려다니지 말고 문화를 이끌고 나갔으면 합니다.“
한국일보 독자에게도 당부를 건넸다. “신문은 우리가 같이 만들어 가는 겁니다. 한국일보를 사랑하는 독자들이 신문에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기자들과 손잡고 자본이나 언론의 성격을 고치기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미디어는 한 시대와 독자 그리고 기자가 같이 만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 목차별로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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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1) 소설가 황석영(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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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2) 소설가 윤흥길(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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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3) 소설가 김금희(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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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4) 시인 조정(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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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5) 소설가 정세랑(기고)
군산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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