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도설] 천안문 탱크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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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 장이 역사를 바꿀 때가 있다.
1987년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진은 6월 민주화운동의 기폭제였다.
안중근 의사 여동생인 안성녀 여사가 1954년 11월 부산 중앙성당에서 열린 안 의사 아들(준생)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진이었다.
AP통신이 촬영한 '천안문(톈안먼) 탱크맨' 사진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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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 장이 역사를 바꿀 때가 있다. 1987년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진은 6월 민주화운동의 기폭제였다. 스물 한 살 청춘의 피가 아스팔트로 낙하하자 분노한 10대부터 넥타이 부대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외쳤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전국적인 시위는 20일 가까이 계속됐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결국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6·29 선언)하고 국민 앞에 무릎 꿇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 열사를 몰라봤다가 망신당한 적이 있다. 2021년 7월 대선 후보 자격으로 부산 민주공원을 방문했을 때다. 이 열사의 조형물을 본 윤 후보는 “이건 부마(민주항쟁)인가요”라고 물었다. 불과 열흘 전 이 열사 묘소를 참배했던 윤 후보였다. 누리꾼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5월 광주의 사진에는 고통이 배였다. 군홧발에 스러진 아빠 영정을 무심히 안고 있는 아이 사진은 지금도 심금을 울린다. 청년이 계엄군의 방망이를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내는 장면은 독재 저항을 상징한다.
사진은 역사의 틈새를 메운다. 국제신문은 광복 60주년이던 2005년 귀중한 사료를 발굴했다. 안중근 의사 여동생인 안성녀 여사가 1954년 11월 부산 중앙성당에서 열린 안 의사 아들(준생)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진이었다. 학계는 “안 여사의 실존 모습이 유일하게 담긴 희귀본이자 안 의사 가문의 가계도를 완성시킨 물증”으로 평가했다. 안 여사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산 영도로 피란 와 1954년 생을 마감했다. 그가 중국에서 독립운동 했다는 사실도 국제신문 보도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사진이 한 국가를 떨게 할 수도 있다. AP통신이 촬영한 ‘천안문(톈안먼) 탱크맨’ 사진이 그렇다. 탱크맨은 1989년 6월 5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 앞에서 민주화시위 진압에 나선 인민해방군의 탱크를 막아 섰던 남성을 가리킨다. 중국 정부가 온라인에서 탱크맨 검색을 차단한 건 당연하다.
4일은 천안문 시위 유혈 진압 35주년이다. 중국에서 6월 4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이다. 천안문 비극을 우회적으로 가리키는 ‘5월 35일’은 금지어나 마찬가지다. 6월 4일을 연상시키는 6.4위안 송금도 불가능하다. 홍콩에선 천안문 희생자 추모 집회조차 금지됐다.
탱크맨의 신원과 생사는 여전히 미궁이다. 수감설·사망설·망명설이 30년 넘게 떠돌 뿐이다. 그가 살아있다면 언제쯤 신분을 공개할까. 표현·집회·언론의 자유가 중국을 감싸는 날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이노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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