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어리석게 살다 간다
고교생 시절 마냥 억울했던 한때, 그러니까 한참 오래전 일이다. 일본 와세다대 영문학과 출신이라는 소문이 은밀히 돌던 영어 선생님의 수업 시간이었다. 그러잖아도 멋진 분이셨다. 구문 분석도 개성이 있었고 번역이라도 할작시면 교과서가 바로 시집으로 둔갑하는 경지였지만 학생들은 입시에 도움이 안 된다고 여겨 수업 시간 동안 아예 대놓고 다른 문제집이나 펼쳐보는 형국이었다. 거개의 학생들이 강의를 듣지 않는다는 사실이 미안해서 나는 강의 시간 내내 선생님과 눈을 맞추려 애를 썼는데, 이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강의할 때 청중이 내 말을 듣지 않고 딴짓한다는 느낌이 들면 순간 무안해져서 하던 말도 꼬이는데,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당해봐서 안다. 정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분이셨는데 얼마나 힘드셨을까.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이지만 동기생들은 냉담했다. 입시, 오직 일류대학 합격만이 고등학교의 존재 이유였고 열등반 담당 교사는 은근히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학교는 그야말로 장래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과 지혜를 가르치고 기르는 일이 기본이어야 마땅하다. 왜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가, 내 몸 사용법, 퇴비 만드는 법, 채소를 기르는 법, 상대를 존중하고 존중받는 법, 옷을 짓는 방법, 약자에 대한 배려심 등. 내가 생각할 때 실제 삶에 긴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가르치지 않았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깨우치고 우리의 미래를 세워야 하는데, 우리 학교는 그러지 않았다. 사람은 다 다르다. 그런데도 각양각색 천차만별인 학생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고 줄 세우는 일에만 오직 진심이었다. 영어 과목만 해도 영문으로 쓴 글을 읽고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양성하는 게 아니라 난해한 문항과 단어를 통해 학생의 등급을 나누고 서열을 정하는 기능에만 열심이었다. 그렇게 정해진 일방적인 서열에 따라 진학할 대학이, 미래가 정해졌다.
강의할 의욕을 잃어버린 영어 선생님은 창밖 붉게 물든 노을을 한참 바라보다가 돌아서며 말을 꺼냈지만 교실은 시끄러웠다.
“이제 돌아갈 날이 가까웠다.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 흩어질 테고 영혼은 우주 어디엔가 있는 영혼의 고향으로 갈 거다. 어디인가는 기억 못 하지만 광활한 우주 저 어느 별, 내 영혼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거야. 이번 여행도 즐거웠다. 언젠가 또 다른 여행을 하게 되겠지. 그건 지구일 수도 있고 다른 별일지도 몰라.”
선생님의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학생은 몇 안 되었다. 다들 뒷전이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정말 그럴 거라고 믿었다. 나는 아직 어렸고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저 어둠 속 광활한 우주, 절대자의 섭리, 윤전하는 숙명. 만일 우주가 끝이 있다면 그 밖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무한하다는 걸 도대체 이해할 수 있는가. 전생을 기억하고 말하는 사람이 가끔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의 전생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어느 별에서 왔을까.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적, 곤히 잠든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 고운 영혼이 숱한 사람들 가운데 하필 나를 찾아와 깃든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워 절로 울음이 터지고 눈물이 났다. 이 고마운 영혼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모시마. 그런데 내가 이 아내가 아니라 다른 여자랑 결혼했다면 이 생명은, 이 영혼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다른 육신이라도 나를 점지한 이 영혼이 찾아왔을 거야. 그러나 사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세상이었다.
이제 이만큼 철이 들어 세상을 좀 더 알게 되고 자연을 들여다보고, 생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끝에 얻은 내 결론은 ‘결코 그렇지 않아’ 였다.
세상을 지배하는 초자연적 존재 같은 것은 없다. 자연에는 의도가 없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시건방이 지구를, 우리 삶의 터전을 이 꼴로 망가뜨리지 않았는가. 인간도 내가 있는 집 지붕에 잠깐 앉아 울다 가는 큰부리까마귀랑 진배없다. 오히려 조금 더 나은 지능이 초래한 부작용이 문제다.
그 경지를 알지 못하니 숱한 허구와 신화가 탄생하고 믿고 속고 속이며 패거리 짓고 헛된 탐욕과 패악질에 다투고 죽이고, 다들 그리 어리석게 살다 갔고 여전히 또 그럴 거라는 사실이 암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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