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고래마을에 고래는 없지만

안지숙 소설가 2024. 6. 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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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숙 소설가

지난 몇 달간 ‘장생포 아트스테이’에서 지냈다. 한때 최적의 고래 서식지였고, 우리나라 포경업의 중심지로 유명했던 그 장생포 맞다. 지금의 장생포는 고래잡이로 번성했던 시절을 지나 고래가 사라진 고래마을이다. 고래뿐이랴. 고래와 함께 인생을 살아온 선원들도 거의 사라졌고, 자신의 배가 대형 고래를 끌고 오기를 목 빼고 기다리던 선주도 사라졌다.

일본에 고래고기를 수출하면서 장생포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으나, 1980년대에 들어서며 고래가 잡히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수 세기에 걸쳐 씨를 말릴 정도로 잡아대는 바람에 주된 포획 대상이던 참고래의 개체수가 급감한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는 고래 개체수가 회복될 때까지 고래 종 전체의 사냥을 금지했고, 장생포는 하루아침에 황량한 어촌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장생포를 고래마을이라 일컫던 모든 게 사라진 셈인데, 장생포는 과연 안녕할까. 고래문화재단에서 입주작가를 공모할 때 고래를 소재로 글을 써주길 바라는 듯해 자료를 찾아보고는 궁금해했던 점이다. 궁금증은 언덕 위에 앉은 아트스테이에 입주하는 첫날 밤 반쯤 풀렸다. 옛 신진여인숙의 원형을 살려 재단장한 건물은 오랜 세월 해풍을 견딘 듯 무겁고 예스러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좁고 기다란 복도를 지나, 이불을 올려놓을 수 있는 선반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방에 누우니 출항을 앞두고 하룻밤을 묵어가는 뱃사람이 된 양 마음이 설레면서도 휑한 기분이었다. 창밖에서 뿌우우 뱃고동 소리가 들려오고, 고된 뱃일에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만선의 부푼 꿈을 꾸었을 뱃사람들의 모습이 잠자리를 어지럽혔다. 장생포의 숨결과 소리와 냄새에 포획되는 느낌이었달까.

입주 이튿날부터 고래문화특구로 지정되면서 관광명소로 위상을 뽐내는 장생포 마을 곳곳을 둘러보았다. 실물 고래골격이 전시돼 있다는 고래박물관을 먼저 찾았다. 포획 당시 전체 길이 12.4m, 실제 무게가 14.6t에 달했던 브라이드고래의 골격 앞에 서자, 이 어마어마한 존재를 멸종 지경으로 내몬 인간에 대해 복잡미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전시관을 돌며 포경 관련 유물과 자료를 둘러보고 고래생태체험관으로 건너갔다. 돌고래 수족관이 있는 곳으로, 먹이를 주는 시간이어서인지 관람객이 몰려있었다. 먹이를 삼킨 돌고래들이 사육사의 신호에 따라 뱅뱅이를 돌고, 자맥질하다 세차게 점프하자 관람객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몇 해 전 터키 안탈리아의 지중해에서 본 고래들이 생각났다. 푸른 바다가 온통 제 것인 양 신나게 뛰어오르던 고래를 보며 느꼈던 환희와 자유로움을, 생명체가 발산하는 아름다움을 수족관의 돌고래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입주 초기에 오호츠크해와 동해를 오가는 한국계 귀신고래가 장생포로 떼 지어 몰려오는 장면을 내 소설의 절정으로 삼아야지 했다. 입소하고 마을을 탐색한 지 며칠 만에 생각을 바꿨다. 아무리 픽션이라도 가당치 않은 희망을 그릴 수는 없었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개체수가 늘어난다 해도 장생포와 인근 해안에서 귀신고래는 물론이고 참고래, 밍크고래가 떼 지어 헤엄치는 장관을 볼 수 있는 날은 좀체 오지 않을 것이다. 고래의 유전자 속에 자신들을 향해 작살을 날리고, 포를 쏘던 인간에 대한 기억이 각인돼 있을 텐데, 고래가 바본가. 인간 다음으로 영리한 동물이 고래다.


장생포가 진정 ‘고래와 함께하는 마을’이 되려면, ‘관광’이 아닌 ‘보호’에 역점을 두는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실상 고래는 평생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축적함으로써 기후 위기 타파에 공헌하는 귀하고 고마운 존재 아닌가. 그 고마운 존재를 멸종위기에 몰아넣은 것을 사과하고, 고래의 자유와 생명을 보호하는 데 장생포 고래문화특구가 전 세계를 대표해 앞장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런 기대가 가능하니 ‘장생포는 안녕할까’ 라는 질문은 무례하다. 고래는 없지만 고래마을 장생포는 건재하다. 아니, 장차 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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