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문 '2196일 걸린 897번째 승', "감독이 잘해서 아니다, 팬들께 감사" 겸손까지 완벽 복귀전 [수원 현장인터뷰]
896승 챙긴 명장이지만 6년 만에 현장에 돌아와 거둔 1승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한화 이글스의 새 사령탑 김경문(66) 감독이 무려 2196일 만에 프로 무대에서 승리를 챙겼다.
김경문 감독이 이끄는 한화는 4일 수원 KT위즈파크에서 열린 KT 위즈와 2024 신한 SOL뱅크 KBO리그 방문경기에서 8-2 대승을 거뒀다.
지난달 27일 최원호 감독과 박찬혁 대표이사가 동반 사임한 뒤 정경배 수석코치 대행 체제에서 시즌을 치르던 한화는 최근 3연패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승리와 함께 25승 32패 1무로 7위 KT와 승차를 0.5경기로 좁혔고 가을야구 마지노선인 5위(SSG)와 승차도 3경기로 줄였다. 감독 선임과 함께 5강권 경쟁 희망을 밝힌 한화다.
지난 2일 한화의 제14대 감독으로 선임된 김경문 감독은 낯선 한화 유니폼을 입고 3일 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에서 취임식과 기자회견을 가졌다. '가을야구 청부사'라는 훈장을 얻었지만 우승 문턱에나 4차례나 실패한 과거를 "나에게는 아픔"이라고 표현하며 "한화에서 팬들과 함께 우승을 차지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나타냈다.
이어 부상에서 돌아온 하주석을 콜업해 올 시즌 처음으로 3번 타자로 출전시켰고 '스피드 야구'를 강조했던 그는 올 시즌 선발 경험이 일천한 유로결을 톱타자로, 장진혁을 9번 타자로 기용하는 파격 용병술을 선보였다.
생각은 확실했다. "제가 생각하는 야구는 원정에 왔을 때는 우리가 먼저 선제 공격을 해서 점수를 내면서 가야 한다. 그래야 투수 로테이션이나 이런 걸 활용할 수 있지. 공격하러 와서 수비적으로 나설 수는 없다"고 말했다.
초공격을 펼치는 원정경기에선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나선 선제점을 내며 주도권을 잡고 경기를 펼쳐야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1회초엔 삼자범퇴로 아쉬움을 남겼지만 2회 안치홍과 채은성이 연속 안타, 최재훈의 볼넷으로 만루를 채웠고 이도윤의 희생플라이로 1점, 장진혁의 2타점 2루타로 3-0으로 기분 좋게 시작했다.
투수진 운영도 돋보였다. 김 감독은 KBO리그에서 14시즌 동안 두산 베어스와 NC 다이노스를 이끌고 10차례나 가을야구에 진출했다. 타자들의 잠재력을 끌어내는데 강점이 있었던 그는 투수 파트에선 선발 야구보다는 불펜의 능력치를 극대화시키며 틀어막는 야구에 능했다.
필승조라 불리는 특정 선수들에 대한 의존이 강했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김경문 감독이 가장 잘했던 게 불펜 투수들을 활용해 승리를 지켜내는 야구였다. 첫날부터 이러한 강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화 선발 황준서가 제구 난조로 3이닝 동안 91구를 던지며 1실점하고 물러났다. 3-1로 앞서가는 상황이었지만 6이닝 동안 불펜진을 가동하며 리드를 지켜야 하는 부담이 컸다.
그러나 장민재에게 멀티이닝을 맡기며 승리 투수를 안겼고 한승혁에게 1이닝을 맡겼다. 나름의 위기도 있었다. 7회말 등판한 김범수가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아내는 동안 볼넷 2개를 내준 것. 김 감독은 박상원을 투입해 이닝을 실점 없이 깔끔히 막아냈고 팀이 점수 차를 벌린 8회말부터는 김규연을 투입해 2이닝을 맡기며 기분 좋은 승리를 따냈다.
896승을 맛봤지만 6년 만에, 정확히는 2018년 5월 31일 공교롭게도 대전 한화전에서 NC 감독으로서 거둔 승리 이후 2196일 만에 1승을 추가했다. 김 감독은 "정말 감독이 승리를 많이 하는 건 감독이 잘해서가 아니다"라며 "선수와 코칭스태프까지 열심히 파이팅을 내줬다. 또 뒤에 있는 한화 팬분들께 정말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선수들로부터 승리 기념구까지 선물 받았다. 주장 채은성은 직접 승리 기념구를 챙겨 김 감독에게 선사했다. 그는 "또 하나의 기념품이 생겼다"며 "1승, 1승이 다 귀중하다. 너무 고맙다. 현장에 다시 복귀한 것도 대단한 일인데 승리까지 하게 되니까 굉장히 마음속으로 기쁘다"고 전했다.
승리 후 박종태 신임 대표이사가 더그아웃을 방문해 김 감독과 악수를 나누며 축하를 보냈고 많은 팬들은 중계 방송사 인터뷰 내내 김 감독의 이름을 연호하며 축하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베테랑 사령탑답게 지나치게 승리에 도취되진 않았다. 그는 "인터뷰를 마친 뒤엔 오늘 이긴 건 빨리 잊고 내일을 잘 준비해 경기를 잘 풀어가야 한다"고 전했다.
유로결의 1번 타자 기용은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올 시즌 1군에서 단 3경기만 나선 채 안타 하나 없이 대부분의 시간을 2군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3타수 무안타로 침묵하던 유로결은 7회말 선두타자로 나서 좌전안타를 때려냈고 9회엔 볼넷까지 얻었다. 4타수 1안타, 멀티출루.
7회 유로결의 안타가 나오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게 중계화면을 통해 그대로 전파를 탔다. 김 감독은 "안타 하나가 왜 이렇게 기쁜지"라며 "그 안타 하나가 굉장히 뜻 깊지 않나. 본인도 무안타로 끝난 것과 안타 하나를 친 것과는 내일 분명히 기분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뿌듯해했다.
전날 베테랑들과 '고기 회동'도 가졌던 터다. 단순히 인사를 하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그치지 않았다. 경기 전 김 감독은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는데 안치홍은 김 감독을 향해 먼저 "2루수를 준비 해야 하나"라고 물었고 김 감독은 "당연하다"고 답했다. 이날 안치홍이 2루수로 선발 출전하게 된 배경이 됐다.
최재훈은 3타수 2안타 1볼넷 2타점을 기록했고 안치홍과 채은성은 안타 하나씩을 때려내며 나란히 2득점씩을 기록했다. 오랜 만에 출전해 낯설 만한 수비 위치에서도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공격에서 효과가 확실했기에 대성공이라 평가할 만한 용병술이었다. 투수진에선 장민재가 2이닝을 지켜내며 승리 투수가 됐다.
베테랑의 고른 활약이 돋보였다. 공교롭게도 전날 김 감독과 식사를 함께 했던 선수들이었다. 김 감독은 "베테랑에게 가서 인사를 제대로 해야 될 것 같다"고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감독을 생각하는 선수단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2008년 두산에서 육성선수로 커리어를 시작해 한화로 이적하며 주전 안방마님이 된 최재훈은 프로 데뷔 때 두산 지휘봉을 잡고 있었던 김경문 감독과 프로에서 연을 맺었던 유일한 한화 선수다.
선수단 인사 때 최재훈을 향해 "좀 잘해주라"라고 말했던 게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최재훈은 "웃으면서 잘하라고 하셨는데 그게 '너만 잘하면 된다'라고 들려서 조금 무서웠다"며 "그래서 무섭다고하니 감독님께서 '내가 때리기라도 했냐'라고 하셔서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감독님께서 할 때 편하게 해 주시고 응원도 많이 해셔서 선수들도 덩달아 힘이 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승리 투수가 된 장민재는 "먼저 말씀을 해 주셔서 준비를 했던 게 이런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며 "앞으로 이런 상황이 왔을 때 항상 준비하고 언제든지 나갈 준비가 돼 있다고 감독님께 확인시켜드리는 투구를 펼친 것 같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이어 "감독님이 바뀌면서 분위기도 바뀌었는데 한 단계씩 올라가려고 선수들이 전부 준비를 하고 있다. 저 역시도 준비를 잘했던 게 경기에서도 이기는 결과로 나타났다"며 "감독님도 돕고 어린 선수들도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우왕좌왕하는 분위기보다는 우리 할 것만 하자는 그런 분위기가 됐다. 이대로만 하면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고기 회동'에 대해서는 "화기애애하고 너무 좋았다. 감독님께서 고참들에게 주문했던 것도 있고 그걸 잘 새겨서 저희가 감독님을 잘 모시면서 시즌을 이어가야 한다. 그것만 집중하고 야구를 했다"며 "각자 보직에 대해서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 너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등을 이야기해 주셨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만 생각하고 경기 때 준비를 해서 편안하게 순리대로 대비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날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은 선발 황준서였다. 1회말을 실점 없이 막아냈지만 볼넷 3개를 내주며 36구를 뿌린 뒤 김 감독은 그에게 다가가 격려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쉽사리 안정감을 찾지 못했고 결국 3회를 끝으로 교체를 했다.
김 감독은 "감독에게 1승을 바치려고 너무 부담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잘못하다가는 열흘이 아니라 더 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1회부터 유심히 지켜봤다. 실점 없이 잘 넘어갔지만 일찍 바꿔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00개를 던지게 하려고 더 내보내는 것보다는 빨리 빼줬다"고 말했다.
"한화 팬들과 우승을 하고 싶다"고 밝힌 그는 이날 원정경기에 홈팬들보다 더 많이 찾아와준 팬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한화 팬들이 이렇게 많이 오셔서 응원을 많이 해주시니 저도 상당히 힘이 나고 고마웠다"며 "약속한대로 조금 더 내용 있게 좋은 경기를 팬들께 보여드리고 싶다고 했는데 선수들이 정말 잘해줬다. 칭찬을 많이 해주고 싶다"고 전했다.
수원=안호근 기자 oranc317@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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