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내게 확신을 줬다” 단색화 거장이 파리서 깨달은 것
1980년 12월 단색화가 윤형근(1928~2007)은 파리로 떠났다. 당시 52세. 불안한 국내 정세에 좌절한 그는 그동안 탐구해 온 ‘천지문(天地門)’ 회화가 유럽 미술계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확인받고 싶었다. 물감을 묽게 스미게 하는 기존 작업 방식은 파리에서도 계속됐지만, 재료는 기존 캔버스 대신 한지를 택했다. 1년 반 파리에 머무는 동안 그는 한지 작업에만 몰두했고, 스스로 천착해온 어법에 확신을 갖고 돌아온다.
파리와의 인연은 2002년 다시 이어졌다. 윤형근은 화상 장 브롤리의 초청으로 파리 레지던시에 3개월간 머물면서 대형 캔버스 회화들을 그렸고, 이 작품들은 같은 해 가을 장 브롤리 갤러리에서 전시됐다.
서울 삼청동 PKM 갤러리에서 열리는 ‘윤형근/파리/윤형근’전은 그의 두 차례 파리 시기 작업을 재조명한다. 1980년대 파리에서의 한지 작업과 이후 2002년 장 브롤리 갤러리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을 중심으로 27점을 전시했다. 모두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갈색(땅)과 청색(하늘)을 섞어 빚어낸 깊은 고요의 화풍을 만끽할 수 있다. 두 시기 작품이 뚜렷하게 대비돼 보는 재미를 더한다. 한지 위에 스며든 청색과 다색의 물감은 겹쳐지고 번지면서 오묘한 스펙트럼을 극대화하고, 세월이 흘러 그린 대형 캔버스 작품들은 힘 있게 그어나간 청다색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화백의 외아들 윤성열씨는 “1980년 파리행은 우리 가족에게 큰 모험이었다. 당시 아버지 작업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동료들의 지적이 심해지자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 현지에 가서 판단해 보겠다는 결심을 하신 것”이라며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고 여러 화랑에서 전시 중인 작품들을 보신 후 아버지는 자신감을 얻고 당신 작품은 변화가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PKM 갤러리는 “윤형근의 작품 세계가 1차 파리 시기에 한지를 통해 구현됐다면, 2차 파리 시기에는 대형 캔버스 위에서 더 과감하고 힘 있게 표출된 것”이라며 “윤형근에게 파리는 자신이 추구해온 조형 언어에 대한 확신의 영감을 제공한 공간이었다”고 했다. 박경미 PKM 갤러리 대표는 “올해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파리는 세계 현대미술의 거점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는 핫한 도시”라며 “지난해 유럽 메가 화랑 데이비드 즈워너 파리에서 윤형근 개인전이 개최돼 큰 호응을 얻었다. 그의 파리 시기 전후 작업들을 재조명하는 일은 윤형근 작업 세계의 변모를 국제적 관점에서 바라볼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했다. 29일까지. 관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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