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잦은 인사와 비선 정치로 실패”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네 차례 일본 총리대신을 지내고 한국 통감에 내정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는 그 이틀 전인 15일 고종(1852~1919, 재위 1864~1907)과 내알현(독대)했다. 고종은 일본에 대한 원망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며 “처지를 바꿔 생각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이토는 “외교권 위임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윽박질렀다. 을사늑약 체결 뒤인 28일 이토를 다시 만난 고종은 “한국 개혁을 도와 달라”며 5항목을 제시했는데 맨 끝에 슬그머니 ‘황실 재산 증대’를 넣었다.
새 연구서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기파랑)를 쓴 원로 정치학자 한상일(81) 국민대 명예교수는 당시 상황을 면밀히 살펴본 결과 ‘고종이 끝까지 을사늑약을 반대했다’는 통설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이미 조약 체결을 기정사실화한 뒤 신하들에게 문구 수위 조절을 지시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주로 일본 측 방대한 외교문서를 통해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부터 1907년 고종 퇴위까지 고종과 이토의 내알현 기록을 중심으로 두 사람의 리더십을 분석했다. 한마디로 ‘침략의 리더십’과 ‘망국의 리더십’이라 할 수 있었다.
이토는 ‘부국강병’과 ‘대륙 진출’을 분명한 목표로 삼고 마스터플랜과 세부 스케줄에 맞춰 단계적으로 한국 병탄에 나섰다. 일본 정부의 각 분야가 유기적으로 호응했다. 체계적이고 일사불란한 리더십이었던 셈이다. ‘이토는 한국을 보호국화하려 했을 뿐 병탄을 원하지는 않았다’는 일각의 시각에 대해 한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1909년 7월 6일 각의에서 ‘적당한 시기에 한국 병합을 단행한다’는 정책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고종은 개혁 의지가 있었고 주제를 돌리며 예봉을 피하는 화술과 임기응변에 능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아관파천(1896)을 거치며 대원군파, 개화파, 온건 개화파 신료들이 차례로 사라진 데다 황제가 된 뒤에는 지나치게 잦은 인사로 인재풀이 무너져 버렸다. 여기에 밀지(密旨), 즉 비선에 의한 무원칙 정책을 남발했다. 한 교수는 “민감한 시기, 실패한 리더십의 전형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토는 침략 욕심으로 일본을 제국주의화와 전쟁·파멸의 길로 이끌었고, 고종은 부족한 리더십에도 불구하고 의병 지원, 밀사 파견 등으로 항일의 불씨를 살렸다는 사실 역시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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