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문학의 최고 걸작… “4000년전 삶과 고민 녹아있죠” [마이 라이프]
이 작품 번역 계기는…
BC 1911년∼BC 1830년 고전어 창작물
귀족이자 궁인 시누헤의 삶과 모험 그려
이집트 문헌학 공부하며 자주 접했는데
2023년 봄 출판사 번역 제의에 본격 작업
완역·작품 의미는…
고대 이집트어 원전 국내서 첫 완역 해내
한국어와 많이 달라 적당한 표현에 고민
당시 사람들의 삶과 욕망·꿈 간접 경험
‘인간성 본질 무엇이가’ 고민하는 계기도
이집트 문헌학 공부는…
새·곤충·식물 그림이 문자 역할 한다니
우연히 접한 고대 상형문자 매력에 빠져
통번역사서 인생 선회… 美 유학길에 올라
고전 번역 계속… 다른 작품도 해보고 싶어
논문을 쓸 때마다 최초의 소설로 알려진 ‘시누헤 이야기’를 비롯해 고대 이집트 고전 문헌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한국어 완역본은 출간되지 않았다. 이집트학이 자리 잡은 영미권이나 프랑스, 독일어권에선 기본적 고전은 모두 완역돼 있었다.
소설은 고대 이집트 중왕국 초기 제12왕조를 개창한 아멘엠하트 1세(기원전 1985~기원전 1956년)와 그 뒤를 이은 센와세레트 1세(기원전 1956~기원전 1911년)가 다스리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아멘엠하트 1세의 궁정 관리인 시누헤는 왕을 대신해 정벌 전쟁에 나섰던 왕자들 가운데 한 명을 수행하던 도중, 국왕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진영을 이탈한다.
“그때 이 원정에서 그의 뒤를 따르던 왕실의 자녀들에게도 (전령이) 보내지니 그중 한 명이 호명될 때 (마침) 내가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가 말할 때 나는 조금 떨어져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심장이 갈피를 잡지 못하며 팔은 늘어지고 사지가 떨리니 숨을 곳을 찾아 펄쩍 뛰어올라 행인과 길이 나뉘는 풀숲 사이로 몸을 숨겼다.”
왕세자는 신속하게 수도로 돌아가서 왕위에 올라서 센와세레트 1세로 즉위했고, 국경을 넘어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도망간 시누헤는 그곳 족장의 도움을 받아 정착한다. 시누헤는 족장의 딸과 결혼하고 이방의 땅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지만 늘 고향을 잊지 못하고 돌아가길 희망한다. 왕은 포고령을 내려 늙은 시누헤에게 탈영의 죄를 사면하고 귀국을 허락한다. 이집트에 돌아온 노인 시누헤는 왕을 알현한 뒤, 왕의 자비 속에 죽음과 영생을 준비한다.
“최고위 궁인에게(나) 행해지는 것과 같이 장례 신관이 배정되었으며 접안시설 앞에 자리한 경작지가 포함된 장례 영지가 하사되었다. 내 형상에는 금박이 입혀졌으며 요의는 호박금으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하도록 하신 분은 (바로) 폐하이시니 (일찍이) 미천한 자에게 이와 같은 일이 행해진 전례가 없었다. (마침내) 정박하는 날이 올 때까지 나는 폐하의 총애 속에 살리라.”
작품은 고대 이집트 중왕국 시대인 기원전 1911년~기원전 1830년에 고전어로 창작되고 신관문자로 기록된 고대 이집트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이집트를 떠났다가 돌아온 시누헤의 삶과 모험을 통해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삶과 욕망, 꿈을 원형 그대로 엿볼 수 있다.
“너무 학술적으로 번역하면 일반 독자들이 읽기 어려울 것이고, 문학 작품이어서 접근성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대 이집트어가 한국어와 워낙 달라서 직역하면 말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아서 적당한 표현을 찾는 것도 고민했다. 신화와 왕이 나오는 데다 이에 맞는 분위기나 용어, 예법이 있어서 의고체를 쓸 수밖에 없었다.”
―왜 시누헤가 갑자기 도망쳤을까.
“주인공이 도망을 안 가면 이야기 전개가 되지 않아서 도망가지 않았을까(웃음). 시누헤가 왜 도망갔을까를 두고 수많은 해석이 있었다. 역사적 기록은 없지만 어떤 궁정 암투가 있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집트를 비롯해 중근동에선 왕 대신 왕세자가 원정을 가는 경우가 많지만 왕이 곧 죽을 상황이라면 원정을 가지 않는다. 왕세자를 비롯해 왕자들이 원정 중에 왕이 갑자기 죽었다는 것은 미리 대비하지 못한 어떤 죽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누헤는 이때 어떤 이야기를 들었고 권력 암투에 휩쓸릴까 봐 도망가지 않았을까 추론한다.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 다른 문헌을 보면, 왕이 호위병에게 죽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내용도 있다.”
―시누헤는 왜 그렇게 이집트에 돌아가서 죽기를 희망했을까.
“이집트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큰 사건이 찾아오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즉 영혼은 오시리스 신이 있는 지하세계에 가서 영원히 산다고. 그런데 영생을 하기 위해선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시신을 미라로 만들고 장례절차를 엄수하며 시신을 잘 보존할 무덤을 지어야 한다. 하지만 외국에서 아무리 성공해도 될 수 없는 것으로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모험소설이라는 점에서 동시대의 ‘길가메시 서사시’와 비교되는 것 같다.
“이집트인에게는 일종의 모험소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보통 모험소설은 여정이 끝나면 정신이 고양되어 오지만 시누헤의 경우 떠날 때도 돌아와서도 그대로 이집트인이다. ‘길가메시 서사시’만큼 스케일이 크거나 역동적이진 않다. 이집트 사람들은 스스로 잘 산다고 생각했고 약간 고립돼 있던 것 같다.”
오, 이런 문명이 있었다니. 고대 이집트 유명한 파라오인 람세스 2세 일대기를 그린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를 재미있게 읽었다. 지금으로부터 4000∼5000년 전 이집트문명의 놀라운 이야기였다. 책이 바람을 일으키면서 고대 이집트 관련서들이 잇따라 출간됐다. 고대 이집트 문자인 상형문자를 다룬 책도 나왔다.
고대 이집트의 언어 체계는 어땠을까. 통번역대학원 1학년생 유성환은 1997년 책을 통해서 우연히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접했다. 카투사로 군대를 다녀온 뒤 통번역사가 되고 싶어서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으로 진학한 그였다. 도대체 무엇을 묘사한 것인지 알 수도 없는 동물과 사물이 가득한 그림들. 사람과 동물, 새와 물고기, 각종 곤충과 식물, 토기와 칼?.
1970년 부산에서 사업하는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유성환은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매력에 빠진 뒤 전문 통번역사에서 이집트학으로 선회, 2012년 미 브라운대에서 고대 이집트 문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고대 이집트의 고전을 번역하고 문헌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고, 2013년부터 서울대 인문대에서 고대 이집트학을 가르치는 한편, 책 ‘고대 중근동 팬데믹’ 등을 저술했다.
―앞으로 꿈이나 포부는.
“고대 이집트 고전(문헌)을 표준이 될 수 있는 번역으로 출간해 내고 싶다. 이번에 ‘시누헤 이야기’가 잘 되면 다른 작품들을 후속으로 완역해보고 싶다. 지금 염두에 두고 있는 작품들이 몇 개 있다. 궁극적인 목표는 고대 이집트 문학 전집이나 고전 문집을 내는 것이다. 더 공부해야 하고 작업도 더 해야 한다. 아마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고대 이집트 고전이나 지혜는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인공지능(AI)을 비롯해 하루가 다르게 새 기술이 등장하고 있다. 이때 가장 흔들리는 것은 바로 인간성이다. 고대 이집트 고전들은 인류가 막 문명을 시작했을 때 쓰인 작품으로, 이런 작품을 읽으면 우리가 지금 얼마나 다른 환경에서 사는지를 깨닫는 동시에, 인간성이라는 게 얼마나 변하지 않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인간성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한번 고민하고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 하는 미래는 어디에서 왔는지 그 출발점으로 한번 돌아가 보면 보일 수 있다.”
이집트 고문헌학자의 답변은 막힘이 없었고, 대답은 어떤 이야기의 숲으로 자주 내달리곤 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숲으로 부지런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 아늑한 곳에 다다른 느낌이 들곤 했다.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고대 이집트의 그곳.
그러니까 그는 강의가 없는 날이면 오전 8시쯤 일어나서 집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의 공유 오피스로 간 뒤 책 속으로 들어가거나, 논문이나 새 책을 저술하거나, 고전을 번역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 무렵 근처 공원에서 만보씩 걷겠지만, 그럼에도 외부 일정을 최소화하고 연구와 저술, 강의의 본업에 매진할 것이다. 우직하고 단조롭게, 꾸준히, 샛길로 빠지지 않고. 그리하여 조용히 만날 것이다.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고대 이집트인들의 마음을. 아직 레반트 지역에서 돌아오지 못한 시누헤의 기도를.
“이 도주를 결정하신 신이 누구시든, 만족하시고 저를 고국으로 보내주소서. 어쩌면 제 심장이 온종일 머무는 곳으로 저를 보내주시겠지요. 저를 낳으신 땅에 제 시신이 묻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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