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윤의어느날] 나와 마주한 한낮

2024. 6. 4.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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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유난히 좋은 한낮이었다.

문제는 순방향과 역방향 좌석이 마주하는 4인용 테이블 좌석 중 하나가 내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부산까지 가는 2시간 30여분 동안 나는 낯선 이와 멀뚱히 마주보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지하철에서 마주한 사람들에 대해 궁금해해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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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유난히 좋은 한낮이었다. 나는 부산행 KTX에 올라 난감한 기분으로 좌석을 살피고 있었다. 매사 꼼꼼하지 못한 나는 사소하고 성가신 실수들을 자주 했는데, 이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좋아하는 6호차 순방향에 창가 자리를 예매한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순방향과 역방향 좌석이 마주하는 4인용 테이블 좌석 중 하나가 내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부산까지 가는 2시간 30여분 동안 나는 낯선 이와 멀뚱히 마주보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꽤나 가까운 거리에서 말이다.
나는 작게 심호흡한 뒤 자리에 앉았다. 출퇴근 지하철에서는 정수리만 빼놓고 온몸이 사람 사이에 꽉 끼어 옴짝달싹 못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에 비하면 쾌적한 환경에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릴 자유도 있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옆자리에 앳된 여성이 앉았다. 짐칸에 커다란 여행가방을 밀어넣었는데도 들고 메고 안은 가방이 세 개나 되었다. 맞은편 자리도 부산하게 채워졌다. 삼십 대 중반쯤 된 독일인 부부(노트북에 독일 국기가 붙어 있어 그렇게 생각한 것일 뿐 독일인도, 부부도 아닐지 모른다)가 테이블을 펼치더니 그 위로 노트북과 배터리, 텀블러와 과자봉지와 수첩 여러 개를 올려놓았다. 그들은 테이블에 몸을 바짝 붙이고 앉아 똑같은 각도로 목을 기울였다. 그러고는 맹렬히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걸까. 나는 그들을 빤히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며 생각했다.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유리창에 그들의 모습이 환히 비쳤다. 그들은 서로의 노트북 화면에 손가락을 갖다대거나 수첩 이곳저곳을 펼쳐 상대방에게 내밀었다. 포장을 벗긴 무언가를 입안에 밀어넣고 작고 딱딱한 것이 부서지는 소리를 연이어 내기도 했다. 그들은 마감에 쫓기는 기자처럼 보이기도 했고 실시간으로 여행 정보를 업로드하는 작가나 블로거처럼 보이기도 했다. 겉보기에 외국인일 뿐 서울로 출장갔다 회사로 복귀하는 부산 토박이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그들만큼이나 분주히 생각을 이어나갔다. 독일 국기 옆에 붙여놓은 정체불명의 스티커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것은 독일어와 한국어로 번갈아 쓰인 어떤 문구였는데, 두꺼운 고딕체로 쓰인 한국어는 다음과 같았다. “참지 말고 참아라.” 대체 무엇을? 어떻게? 참지 말고 참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건 굉장히 한국적인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뭐든 결국은 버티라는 말 아닌가.

그러자 이 모든 상황이 낯설고도 익숙해졌다. 나는 지하철에서 마주한 사람들에 대해 궁금해해본 적이 없었다. 대개 핸드폰을 보거나 잠을 잤고, 바투 앉은 사람에 대해서는 한 가지만 생각했다. 위험한 사람인가 아닌가, 자리를 피해야 하나 그대로 있어도 되나. 확인차 눈을 떠보면 그들 역시 나와 똑같이 지루하고 피곤한 얼굴로 멈춰 있었다. 나는 그런 시간 속을 살아왔다. 누구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 곳에서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으며, 다만 외롭게, 참고 또 참으며 살고 있었다. 열차가 종착역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통로로 몰려갔다. 어쩐지 모두 닮아있는 뒷모습이었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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