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의 묵언]알면서도 방관하는 악당들

기자 2024. 6. 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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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는 신선하고 태양은 명랑하며 달은 살갑다. 성가신 벌레들도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다. 유월의 멋진 날들이 펼쳐지고 있다. 한데 밤바람이 수상하다. 한기가 묻어있다. 거의 초가을 바람이다. 숲속의 꽃들을 만지고, 보리밭을 헤집고 나와서 채 열꽃이 가시지 않았을 텐데도 그 숨결이 차갑다. 이맘때의 바람에서는 비린 듯 달착지근한 풀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 바람이 아니다.

식물들은 더 깊이 느낄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기에 모든 촉각을 동원하여 바람이 전하는 말을 판독할 것이다. “식물은 세상에 대해 반응한다. 식물도 보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고, 들을 줄 안다.”(샤먼 앱트 러셀 <꽃의 유혹>) 모든 문을 열어 빛과 공기, 소리까지 흡입하던 풀과 나무들은 낯선 바람을 맞아 당황할 것이다. 사과나무는 지난해 혹독했던 찬바람을 떠올리며 몸을 떨 것이다.

기후재앙이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 인도 뉴델리를 비롯해 태국,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기온이 50도에 육박했다. 불지옥이 따로 없다.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힌다. 기후재앙은 어디에서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 없다. 지구촌에 안전지대는 없다. 하늘과 땅, 바다가 모두 위험하다. 뉴욕에서 버린 욕망의 찌꺼기가 허공을 맴돌다 몽골 초원에 떨어진다. 과학자들은 오래전에 예고했다. 지금 당장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인류에게 미래가 없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인간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인류는 전혀 낯선 자연과 마주쳤다. 자연은 인간 편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앞으로 인간의 문명은 한나절의 비에도 쓸려가버릴 것이다.

“지구는 얌전한 도련님이 아니다. 긴 세월 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의 풍모를 가지고 있다. 지구의 예민한 반응 혹은 작은 몸부림은 생명체에게 치명적인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이 사건은 대부분의 경우 기존 생명체들의 소멸과 생명체의 발현이라는 과정으로 이어진다.”(전병옥 <기후위기+행동사전>)

지난 늦봄 손아래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갈 때였다. 갑자기 거센 비바람이 차창을 때렸다. “봄날씨가 왜 이럴까.” “글쎄요, 앞으로 좋은 날이 있을까요?” “올해도 좋은 사과 먹기는 어렵겠고만.” “글쎄요. 아마도 앞으로 과일은 먹기 힘들 거예요.” “정말로?” “아무렇게나 살면서도 좋은 과일을 바란다면 그건 과한 욕심이지요.” “그럼 어떡해야지?” “글쎄요….” 우리 얘기는 거기서 끊겼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글쎄요’를 되뇌며 ‘글쎄요’에 갇혀 있었다. 다 알고 있지만 행동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도되는 기후재앙 소식을 접하면서도 인간들은 놀랍도록 평온하다.

세계는 한국을 기후악당으로 분류한다. 온실가스와 쓰레기 배출량이 세계 최상위권이다. 지난해 기후변화 대응 순위가 67개국 중에서 64위였다. 한국보다 낮은 3개국은 모두 산유국이라서 사실상 꼴찌였다. 또 세계 기후환경단체들의 연대체인 기후행동네트워크는 ‘오늘의 화석상’을 한국에 안겨줬다. 국제사회가 ‘기후협상의 진전을 가로막는 나라’로 지목한 것이다. 한국이 기후악당이라는 인증서이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구온난화시대가 끝나고 ‘끓는 지구의 시대’가 시작됐다며 “인류가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고 단언했다. 그 맨 앞에 한국이 있다.

그럼에도 정부의 기후위기 정책은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22대 국회가 개원했어도 기후위기를 말하는 정당이 없다. 정치권이 특검법안들을 쏟아내며 상식과 정의를 외치지만 기후재앙을 막아보자는 얘기는 들을 수 없다.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는 정책에는 그저 입을 다문다. 모두가 ‘글쎄요 정당’이다. 알면서도 방관하는 기후악당들이다.

최근 세계 여러 나라 K팝 팬들이 주도하는 기후행동 플랫폼 ‘케이팝포플래닛(KPOP 4 PLANET)’이 결성되어 관심을 모았다. 그들이 외친다. “죽은 지구에 케이팝은 없다.” 국적을 떠나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고마운 청년들이다.

하지만 지구는 멸망하거나 죽지 않는다. 희귀종이면서도 멸종 위기종인 호모 사피엔스가 서식지를 잃을 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자연의 흉측한 모습은 탐욕에 찌들어 망가진 인간의 모습이다. 올여름도 평년보다 무덥고 비는 더 많이 내릴 것이란다. 해마다 똑같은 기상청의 예보이다. 우리는 그저 턱을 괴고 흘려들을 뿐이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공감과 연대의 극적인 반전은 일어날 것인가.

김택근 시인

김택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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