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전략적 모호성은 답이 아니지만

김유진 기자 2024. 6. 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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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미국 대선에서 만에 하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한국 등 주요국은 대외정책을 ‘리셋’해야 할지도 모른다. 임기가 3년 남은 윤석열 정부의 외교전략 설정·수행에 문제는 없었는지 짚어봐야 하는 까닭이다. 최근 한·중·일 정상회의 개최나 한·러관계에 관한 대통령의 언급 등을 보면 정부도 그런 작업을 하는 것 같지만, 이왕이면 근본적인 성찰까지 나아가기를 바란다.

현 정부 외교기조의 가장 큰 특징은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탈피했다는 점이다. 중국 견제가 초점인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기꺼이 동참했고, 일본에 일방적으로 양보하면서 미국이 바라던 한·미·일 삼각공조를 완성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중 전략경쟁 고조로 인해 규칙 기반 국제질서는 와해되고 블록화가 심화되고 있다. 모호성에 기대어 숨어버리는 것이 능사가 아닌 시대이다. 북핵 위협 고도화에 대응하려면 한·미·일 안보협력이 필요하고, 주요 7개국(G7) 진입을 꿈꾸는 나라라면 첨예한 사안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구호보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실행계획이다. 특히 선택에 뒤따르는 반작용이나 의도하지 않은 결과까지 고려해 국익에 초래할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 부분에서 지난 2년간 정부의 행보는 낙제점에 가깝다. 3국 협력 강화를 대중관계에서 레버리지로 활용하지 못했다. 북한 문제에서만큼은 중·러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한 외교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러시아가 ‘대북제재 CCTV’ 역할을 해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전문가패널을 끝장내는 것을 막지 못했다. 국내적 합의 없이 추진한 한·일관계 ‘개선’은 일본의 독도·역사교과서 왜곡을 멈추지 못했고,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라인야후 관련 갈등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글로벌 지형에서 한국이 어정쩡한 균형외교나 모호성을 추구하는 일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하지만 무게중심이 지나치게 한쪽에 쏠리면 현상 유지를 위해 반대쪽에서 힘을 들이는 게 이치다. 그래서 “중국에도 대만에도 셰셰” “우크라이나는 신세질 게 없는 나라”라는 야당의 그릇된 판단이 우려스러운 만큼이나 윤석열 정부가 파탄난 남북관계와 중·러와의 관계를 관리할 방책도 없이 미·일 일변도 외교로 내달리는 것이 불안하다. 현 정부의 외교 방향을 대체로 지지하는 워싱턴의 미측 인사들도 “한국의 대북·대중 접근은 언제라도 스윙(swing)하는 것 아니냐”고 묻곤 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념·철학이 다른 정부의 등장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국익과 직결된 외교기조가 정권별로 휘청인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외교의 정치화’는 경계해야 하지만 국내에서 충분한 공감대를 갖추지 못한 외교정책은 롱런하기 힘들다. 가깝게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실패가 이를 보여준다. 덧붙여서 윤 대통령이 아직도 “보편적 가치 기반 연대는 지금의 외교적 현실에서 가장 전략적인 선택”(2023년 신년사)이라고 믿는다면 자유·인권·법치·민주주의 등이 국내에서 처한 현실부터 돌아보는 게 순리 아닐까. 우리 안의 모순을 방치한 채로 외교무대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도 없다.

김유진 워싱턴 특파원

김유진 워싱턴 특파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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