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료 분리징수 합헌"... KBS, 구조조정 나서나
“(TV 수신료 분리징수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거구나, 이 상황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다들 걱정하고 있다. 심지어 박민 사장 등 현 경영진은 그동안 구성원의 우려와는 전혀 관계없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으니 다들 더 불안해한다.”(KBS A 기자)
5월30일 오후 4시30분께 헌법재판소가 정부가 추진한 TV 수신료 분리고지·징수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KBS 구성원이 헌재에 걸었던 일말의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지난해 7월12일 TV 수신료·전기요금 분리징수를 명시한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이 시행되자 “수신료 약 2000억원 이상을 징수비용으로 낭비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김의철 당시 KBS 사장의 대국민 호소와 함께 KBS가 위헌확인 헌법소원을 청구한지 약 10개월 만에 나온 선고다. 수신료 분리징수를 전격 시행하려는 주체에겐 헌법소원이라는 가장 큰 걸림돌이 해결된 셈이다.
헌재가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 위헌확인 청구에 대해 기각 결정을 내리며 수신료 분리징수로 인한 KBS의 재정 위기는 눈앞에 닥치게 됐다. 지난해 3월 대통령실이 주도한 ‘TV수신료 징수방식 개선’ 관련 여론 수렴 절차로 시작된 정부의 수신료 분리징수 추진을 두고 당시 KBS는 분리징수 시행 시 납부 회피, 징수비용 증가 등의 여파로 수신료 순수입이 급감할 것이라며 크게 반발했다. 지난해 11월 박민 사장 취임 후 개최한 국·부장급 이상 대상 워크숍에서 수신료 징수액은 2106억원 줄고, 징수비용은 603억원 증가할 것이라는 추정치(결손 비율 30% 가정 시)를 제시했던 KBS 사측은 ‘2024년도 종합예산안’에선 수신료 수입이 전년(6850억여원)보다 2613억원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수신료는 KBS 전체 수입의 약 45%를 차지하는 주요 재원이다. KBS, 한국전력공사 등 수신료 징수 주체 간 논의 등을 이유로 미뤄졌던 수신료 분리징수가 이번 헌재 결정으로 속도가 붙어 본격 시행된다면 KBS의 재정 타격은 현실화될 수 있다.
이번 헌재의 합헌 결정으로 인해 KBS 내부는 무력감마저 감지된다. 앞서 박민 사장 취임 이후 KBS 사측은 ‘광고 수입 악화 등으로 인한 계속되는 적자, 수신료 분리징수로 유례없는 재정 및 경영위기’라는 이유로 임금 삭감, 프로그램 제작비 축소 방침을 정했고, 구조조정 가능성마저 언급한 상황이다. KBS B 기자는 “임금 삭감의 경우 사장이 임원회의, 주니어 연차로 구성된 레드팀 회의 등에서도 계속 얘기하고 있다고 하더라.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직원들이 회사 어려우니 무조건 받아들여 주겠나”라며 “대신 사장 취임 직후 일어난 진행자 교체, 프로그램 폐지 등 과거 과오에 대해 반성을 하는 등 먼저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거다. 그런 행동을 선행하지 않고 경영진이 계속 구성원 희생만을 강요한다면 지금 같은 내부 분위기로는 아무에게도 동의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수신료라는 공적재원이 투입되며 가능했던 공영방송의 역할을 이제는 제대로 유지할 수 없겠다는 구성원의 고민도 크다. KBS C 시사교양 PD는 “한민족 방송, 소외계층을 위한 사업 등은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공영성을 위해 유지를 해왔던 건데 이제 여기부터 정리가 될 수밖에 없다. 사실 가장 피해를 많이 보는 건 사회적 약자들”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임금 삭감이나 구조조정이 무서운 건 아니다. 경영진들도 최선을 다했다는 전제하에 진행되면 감내해야겠지만, 그동안 자부심을 느끼고 일하고 있었는데 당장 맞닥뜨린 현실로 인한 정체성 혼란, 자괴감들이 생길 수 있다는 게 더 문제”라며 “광고 수입이 전체적으로 낮아지면서 예능, 드라마도 수신료를 베이스로 한 예산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는데 기존 시사·교양 프로그램이 보장받았던 예산에서 엄청나게 비용 절감이 이뤄질 거고 그에 따라 공공성,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 프로그램의 축소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헌재 기각 결정으로 KBS 내부에선 박민 사장 등 경영진에 대한 책임론이 대두된다. 해임된 김의철 전 사장 시절 청구한 헌법소원에 대해 현 경영진은 의견서나 탄원서를 단 한 번도 제출하지 않는 등 부실한 대응으로 결국 합헌 결정까지 이르게 했다는 지적이다.
‘KBS는 수신료 외에도 광고 수입이나 정부 보조금 등을 통해 재정을 보충할 수 있어 수신료 분리징수는 KBS의 재정적 독립에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없다’ 등의 헌재 기각 판단에 대해 A 기자는 “원래 헌법소원은 제기한 쪽에서 회사에 얼마나 문제가 생기는지, 기본권이 얼마나 침해되는지 등을 적극적으로 제시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으니 헌재는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됐던 것”이라며 “이제 경영진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본다”고 비판했다. C PD도 “헌재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사측이 수신료 분리징수가 얼마나 부당한지를 충분히 설명을 했어야 한다. 구성원으로선 통탄스럽고 화가 난다”고 토로했다.
이런 와중 박민 사장 등 주요 임원들이 헌재 선고 당일 방송경영인 세미나 참석을 위해 제주도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논란이 됐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는 5월31일 성명에서 “사장이 서울로 돌아와 비상회의를 소집해도 모자랄 판에 주요 총국장들과 제주도에서 술판을 벌이는 게 가당키나 한가”라며 “헌재에 나타난 회사 측 인사라고는 정책기획부 팀장과 법무실 직원뿐이었다. 회사가 얼마나 수신료 제도에 관심이 없는지, 또 법률 대응에 얼마나 안이하고 부실하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질타했다. 이어 KBS본부는 “이번 헌재 결정을 계기로 낙하산 박민 사장에게 끝까지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각종 요금의 보증 및 납부 방법이 전산화, 다양화되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곧바로 KBS의 재정적 손실이 초래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지만, 분리 고지·징수 방식의 수신료가 제대로 걷힐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우선 분리징수로 납부 회피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큰 상황임에도 KBS는 이를 강제 집행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다. 방송통신위원회의 ‘승인’을 얻어야만 KBS는 미납 요금을 강제 집행할 수 있는데 여전히 방통위의 결정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KBS 사측이 아파트 가구 중 수신료 분리납부 신청 세대에 대한 징수 대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종이고지서 납부 방식만을 고려해 “수신료 포기나 다름없다”는 우려도 이미 나오기도 했다. KBS본부는 5월24일 성명에서 “분리납부 신청자가 입력하는 정보는 주소 수준이고, 개인정보와 결제수단 등록 등은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측은 수신료 지사에 자동이체나 카드결제는 수수료 요율 협상 문제로 불가능하다고 공지했다고 한다”며 “정권의 바람대로 공영방송을 파괴시키기로 작정한 것인가. 수신료 포기나 다름없는 분리고지를 추진한다면 박 사장을 몰아내는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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