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줄 때와 찾을 때 [김탁환 칼럼]

한겨레 2024. 6. 4.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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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월호 참사와 국정농단을 덮고 지나가려 한 자들의 불법 행위를 특검을 통해 밝혀낸 적이 있다. 채 상병 사건은 시간을 끌수록 잊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질문과 상상이 쌓일 것이다. 때가 되면, 한여름 감자나 늦가을 쓰레기처럼 사건을 감추려 한 자들이 누구이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드러날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김탁환 | 소설가

꽃을 따고 감자를 북 주었다. 작년엔 희고 붉은 감자꽃이 고와 밭에 가득 필 때까지 내버려 뒀더니, 감자가 잘고 적게 열렸다. 땅이 갈라지는데도 북 주지 않는 바람에, 햇볕에 노출되어 독성이 생긴 푸른 감자도 여럿이었다. 올해는 꽃망울이 맺힐 때 밭을 돌아다니며 딴 뒤, 감자 뿌리 윗부분까지 호미로 흙을 골고루 덮었다.

벚꽃 필 무렵 섬진강을 찾는 이들은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한 강둑을 칭찬하였다. 나도 상춘객으로 이 강을 오갈 때는 굽이굽이 긴 강이 참으로 맑다는 느낌을 받았다. 올겨울부터 한달에 한번 섬진강 청소를 시작하며 뒤늦게 깨달았다. 쓰레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풀이 가렸다는 것을. 2월 하순부터는 강가에서 하고 싶은 일이 더 늘었다. 봄나물을 뜯는 것이다. 쑥이며 달래며 쑥부쟁이며 돌나물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 강둑을 덮었다. 처음엔 쓰레기를 먼저 치우고 나물을 뜯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봄나물들이 비닐봉지와 플라스틱과 고철에 한 몸처럼 들러붙은 경우가 많았다. 벚꽃이 지고 장미가 필 즈음엔 섬진강 청소를 중단했다. 풀이 한껏 자란데다가 뱀들까지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올 6월은 두가지 새로운 상상과 함께 시작했다. 작년 6월에도 텃밭에서 감자를 기르고 초록으로 뒤덮인 강을 따라 산책했지만, 떠올리지 못한 상상이다. 하나는 두툼하게 북 준 흙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감자다. 기울어진 줄기나 무성한 잎을 어루만지며 땅 밑에 감자가 몇개나 생겼고 얼마나 클 것인지 구체적인 숫자로 추측한다. 유난히 키가 작거나 색이 바랜 녀석들에겐 물도 더 자주 주고 풀싹까지 일일이 손으로 걷어낸다. 다른 하나는 강둑에서 썩지도 않은 채 풀뿌리에 엉키고 풀잎에 가려진 쓰레기다. 유난히 키가 높은 풀숲을 보면 그 아래 다 쓴 퇴비 자루라도 버려졌을까 추정하고, 고라니 발자국이 유난히 잦은 강둑에선 특이한 냄새를 뿜는 약병이라도 있는지 걱정한다. 확인하려면 장화를 신고 장갑을 끼고 집게를 든 채 가파른 강둑을 오르내려야 한다. 설령 거기서 쓰레기들을 발견하더라도 수거가 매우 어렵다. 다 자란 풀들이 심각한 방해꾼이 된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면 빗물이 내내 그 쓰레기들을 때리고 적신 뒤 강으로 흐를 것이다.

6월에 품은 상상들은 한여름과 늦가을에 현실로 바뀐다. 먼저 텃밭의 감자는 느지막이 4월 초에 심은 것을 고려해도, 7월 초엔 수확이 가능하다. 강둑의 쓰레기들은 풀이 말라 스러지고 뱀이 겨울잠에 들어가는 11월 중순부터는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한여름에 감자를 캐는 것과 늦가을에 쓰레기를 줍는 것은 내 상상이 얼마나 타당했는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한여름에 감자를 캐고 나면 텃밭엔 다른 작물을 심는다. 감자가 그 밭에 자라며 농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간은 석달 남짓이다. 그런데 강둑의 쓰레기는 짧게는 일년 길게는 십년이 넘기도 한다. 쓰레기는 왜 이토록 오랫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는 걸까.

쓰레기가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때는 겨울이다. 우연히 강둑에서 쓰레기를 발견하더라도, 강바람을 무릅쓰고 얼어붙어 미끄러운 경사면을 타려면 각별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눈이 녹고 훈풍 부는 봄날에 쓰레기를 줍기로 미루면 어느새 풀이 자라고 뱀이 깨어나 돌아다닌다. 쓰레기가 거기 있는 줄은 알지만 당장 눈에 뵈지 않으니, 모내기와 밭일부터 하고 추수 끝난 늦가을 한가할 때에 따로 시간을 내는 것으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21대 국회에서 ‘순직 해병 수사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은 끝내 통과되지 못했다. 22대 국회에서 다시 처음부터 특검을 설치하기 위한 법안을 진행해야 한다. 채 상병이 어떻게 세상을 떠났고, 또 진상규명을 방해한 자들이 누구인지 명명백백하게 수사해야 한다. 흙이나 풀로 덮어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세월호 참사와 국정농단을 덮고 지나가려 한 자들의 불법 행위와 협잡을 특검을 통해 밝혀낸 적이 있다. 채 상병 사건은 시간을 끌수록 잊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질문과 상상이 쌓일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한여름 감자나 늦가을 쓰레기처럼 사건을 감추려 한 자들이 누구이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불편하고 힘겹다고 다음으로 미뤄선 안 된다. 북풍이 몰아쳐도 쓰레기를 찾을 땐 찾아야 하고, 뙤약볕이 뜨거워도 감자를 북 줄 땐 북 주어야 한다. 제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지금부터 할 일을 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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