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도 자란다 [한겨레 프리즘]
박태우 | 노동·교육팀장
“아빠, 나 30분만 놀이터에서 놀아도 돼? 제바알~”
회사에서 입에 단내 나게 마감하고 숨을 돌릴 오후 즈음이면 초등학교 2학년 둘째에게서 전화가 온다. 방과후·돌봄교실, 학원 뺑뺑이를 마친 뒤 ‘나도 좀 놀아야겠으니 놀게 해달라’는 취지다. ‘숙제를 해야겠는데 책이 없어졌다’거나 ‘학교에서 옷이 더러워져서 속상하다’ 등의 전화나 카톡도 수시로 온다. 학교나 돌봄교실, 학원에서 오는 연락도 마찬가지다. 초등학교 5학년인 큰애까지 포함해 아이를 ‘키운’ 지 10년이 넘었지만, 업무시간에 이런 연락을 많이 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부터다.
이유는 단순하다. 지난 3월까지 1년여 동안 육아휴직을 했기 때문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아이들과 온전히 보낼 수 있었던 1년은 인생의 ‘화양연화’였다. “바다가 보고 싶다”는 첫째의 말에 훌쩍 동해로 떠난 것을 시작으로 회사 간 아내를 빼놓고 셋이 이곳저곳 여행도 자주 다녔다. 아이 혼자서는 다닐 수 없는 박물관이나 문화센터 프로그램도 알차게 챙겨 다녔다.
그러나 복직 뒤 가장 그리운 ‘휴직’의 순간은 ‘특별한 이벤트’보다는 아이들과 함께했던 ‘일상’이다. 학교 끝난 뒤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깔깔대며 뛰어노는 풍경, 아이 손을 잡고 동네를 거닐다 사 먹은 아이스크림, 첫째가 집에 데려온 친구들에게 간식을 내어주며 함께 했던 수다 같은 것들. 아이들이 하루를 어떻게 보냈고, 친구 관계는 어떤지, 요즘 고민이 무엇인지 등 늘 궁금했지만 알기 어려웠던 것들이 ‘주양육자’가 되니 조금이나마 감이 잡혔다.
휴직 중 좋아진 아이들과의 관계는 복직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믿는다). 휴직 때 부여됐던 ‘주양육자’로서의 의무들이 관계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 그래 봐야 학교·학원에서 오는 연락에 응대하는 것이나 아이들의 요구 해결이 대부분이지만 ‘보조’ 역할에 머물렀던 지난날들과는 다르다. 아이들이 속상할 때 먼저 전화하는 사람이 엄마가 아니라 아빠일 수도 있다는 것에 은근한 자부심도 느낀다. 똑같이 일하면서도 육아에서 더 많은 의무를 졌던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도 커진다. 새 학기 시작 전 방과후·돌봄·학원 일정표를 짜면서 힘들어할 때, “나는 회사 다니면서 다 했던 일인데 무슨 엄살이냐” 했던 아내의 핀잔이 어떤 의미였는지 복직하고서야 알게 됐다.
육아휴직을 결심하기 전 고민이 없진 않았다. 회사에서 해야 할 일이 적지 않았고, 아내가 돈을 번다 해도 월 112만5천원(월 37만5천원은 복직 6개월 뒤 받을 수 있다)의 육아휴직 급여로 생활이 가능할지에 관한 걱정, 아이가 ‘영유아’도 아닌데 휴직하는 것을 안 좋게 보진 않을까 같은 자기검열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아빠로서 그나마 ‘성장’할 기회를 놓쳤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육아휴직에 관한 권리는 엄마와 아빠를 가리지 않는다. 2011년 1400명가량이던 남성 육아휴직자는 2022년 3만8천명으로 늘어났지만, 여성 육아휴직자 9만3천명보다는 한참 적다. 여성 육아휴직자의 기업·소득에 따른 격차는 줄어들고 있지만, 2022년 기준 남성 육아휴직자의 39.3%가 1000인 이상 기업 소속이고, 절반 이상이 월 임금 300만원 이상이라는 점을 보면 ‘아빠 육아휴직’이 아직은 ‘제한된 권리’임이 확인된다.
육아휴직 급여 수준을 인상해 ‘소득대체율’을 높여야 아빠든 엄마든 부담을 덜어내고 육아휴직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대법원이 육아기 노동자의 일·가정 양립을 지원하기 위한 사업주의 배려 의무를 인정한 만큼, 사업주의 인식 개선과 이를 추동할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도 필요하다.
‘육아 선배’들은 아이들이 어릴 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고 조언한다. 육아휴직과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등의 권리를 모든 엄마·아빠 노동자들이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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