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네?"…김기린 흑단색화와 안과 밖[박현주 아트클럽]
서울 삼청동 현대화랑서 5일 개막
불문학과 출신 단색화 선구자
사이먼 몰리 평론가 "김기린 작품은 무언의 메시지"
"있는데 보이지 않는 무위의 도가사상과 연결된다"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김기린 작품은 색으로 써진 시(詩)다"
4일 오전 서울 삼청동 현대화랑에서 열린 단색화가 김기린(1936~2021)작품을 프랑스 평론가가 설명하는 이례적인 간담회가 열렸다.
2021년 별세한 후 첫 전시이자 현대화랑서 8년 만에 선보인 김기린 개인전 타이틀 '무언의 영역(Undeclared Fields)'. 평론가 사이먼 몰리가 쓴 에세이 '무언의 메시지(Undeclared Messages)'에서 차용한 제목이다.
김기린의 검은 그림 앞에서 사이먼 몰리는 "아무것도 없네? 이게 무슨 그림일까 할 수 있다"면서 말을 이었다. "이는 정확하게 의미가 표현이 안됐기 때문인데 그 이면에 뭐가 있다는 것을 다 느낄 수 있다. 김기린 작품은 무언가 메시지가 있다고 느껴지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했다.
색과 흔적만 남은 질감만 있는 작품. 그렇다면 김기린은 무엇을 그린 것일까?
사이먼 몰리는 "김기린 작품은 이름 없는 이름을 말하는 것 같다"며 "반복된 그림의 형태를 일종의 메시지를 쓰는 과정"이라고 봤다.
"점의 패턴이 손가락 지문을 연상시키고 비밀 코드가 입력된 것 같은 인상이 있다"면서 사이먼 몰리는 김기린의 회화를 '도가사상'과 연결했다.
"(김기린은)진짜 존재에 대한 진실을 과연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가 표현할 수 있을까 회의가 있었다. 그래서 작가가 생각한 유일한 방법은 부정하는 것, 부재 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진짜 존재에 대한 진실을 보여 주는 게 아닐까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사이먼 몰리는 모노크롬 작업에 관심이 많아 그동안 국립현대미술관 정상화 회고전과 아그네스 마틴 등의 평론을 자주 쓴 평론가로, 그는 "김기린의 작업은 한국 단색조 작가들 달리 무언가 다르다고 느꼈다"고 했다.
김기린의 1970년대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흑단색화’(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문 같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진짜 진실은 쓰여질 수 없다. 모든 진리는 정확하게 이름이 없지 않나. 김기린 작품은 그것과 연결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서양인 평론가의 개념적이고 진지한 설명이 더욱 작품을 난해하게 하지만 동양인이라면 다 느낀다. 정신적 자유의 경지인 '몰아일체', 수행 속에 나온 명상적인 작품이라는 것을.
김기린은 생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1차, 2차, 3차 공간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공간 '지각 현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라고 했다. "순수한 색의 유화 물감을 겹겹이 쌓아가는 회화를 지속하는 이유는 스스로가 반듯이 서기 위해 그림을 하는 거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이번 전시는 김기린의 단색적인 회화 언어가 구축된 시기인 1970년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연작부터, 1980년대부터 2021년 작고할 때까지 지속한 '안과 밖' 연작을 선보인다. 또한 생전에 공개된 적 없는 종이에 유화 작업까지 40여 점의 작품과 그가 직접 창작한 시, 아카이빙 자료를 한자리에서 소개한다.
"텍스트 없이 색으로 써진 시'라는 맥락"으로 해석한 프랑스 평론가 사이먼 몰리의 말처럼 김기린은 불문학과 출신이다. 초기 단색 화가들과 결을 달리하는 배경이다.
김기린은 1961년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에 관한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떠났다. 20대 시절인 그 때 랭보(Arthur Rimbaud),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의 시를 읽고 시 집필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러다 30대 초반 미술사를 공부하며 뒤늦게 그림 작업을 시작했다.
1960년대에 원고지에 펜으로 꾹꾹 눌러 쓴 시는 보일 듯 말 듯 그려진 격자 모양 단색의 캔버스 화면에 점점이 쌓아 올린 물감 덩이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청년 김기린은 말로 설명되지 않는 내면의 세계와 파리에서 경험한 다양한 장르의 문화적 자극을 캔버스 위에 텍스트가 아닌 물감의 양감으로 표현했다.
물감으로 점을 찍기를 30번 씩 거듭하며 나오는 작업은 2년의 시간이 숙성됐다.
김기린은 가로와 세로의 선으로 그리드를 형성한다. 이로 인해 생겨난 수많은 작은 단위의 네모꼴 속에 비슷한 크기의 색점들을 일률적으로 찍고, 그 위에 색을 수십 번씩 반복해 칠하고 쌓아 올린 후 작품을 완성한다.
그는 그림을 ‘하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색을 놓지, 바르지 않으며 점과 줄을 팠지, 찍거나 긋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든 그림의 과정이 ‘제조’의 개념이기보다 ‘인식 작용’을 수반한 ‘실천’의 의미다.
생전 김기린은 점을 찍는 순간이 스스로를 뛰어넘는 제일 충만 된 시간이라고 했다.
한 점 한 점 쌓여 생성된 수십 겹의 붓 자국의 흐름을 따라 작가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작업해 간 흔적을 읽어 가게 된다.
"사각형 패턴을 해서 찍는데도 찍는 순간마다 점이 다 다르다. 그게 내 그림의 생명력이라 생각한다."(2021년 인터뷰 중에서)
색과 물감 덩어리 그 너머, '김기린 회화'는 '무언의 영역’으로 초대한다. 무언가 알 수 없어 다가왔다가 명상의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 이미지로는 모른다. 진짜 그림을 봐야 느낀다. 가까이 다가오라고 끌어당긴다. 전시는 7월14일까지.
단색화가 김기린(金麒麟, 1936~2021)은?
1960년대 말부터 서정적인 추상 회화를 시작하여 검은색과 흰색을 사용하여 평면성을 추구하는 회화 작업을 했다. 1970년대 초반에 흑단색화 작업만을 소개하는 파리에서 개인전이 한국에도 화제가 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이후 색채 사용이 두드러지고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왔던 지각에 관한 문제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연작에서 풀어냈고, 1980년대 외부와 내부의 개념적인 차원의 탐구를 '안과 밖' 연작에서 지속하며 작업을 심화시켰다. 적색·청색·황색·녹색·갈색 등의 선명한 색채를 사용했다. 프랑스에서 살던 그는 2021년 숙환으로 향년 85세에 별세했다.
대표작은 국립현대미술관, 대구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우종미술관, 리움미술관, 파리시립현대미술관, 프랑스 디종미술관에 소장 되어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hyu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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