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게 뭐야”…AI가 완성한 슈베르트 교향곡 연주해보니

임석규 기자 2024. 6. 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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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10번 교향곡은 5번의 ‘짝퉁’
서울시향 퇴근길 콘서트서 국내 초연
서울시향이 5월28일 퇴근길 콘서트에서 인공지능(AI)이 완성한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과 베토벤 10번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인공지능(AI)이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의 나머지 3, 4악장을 완성한다면? 베토벤이 토막토막 남긴 스케치를 학습한 인공지능이 10번 교향곡을 만든다면? 서울시향이 지난달 28일과 30일 퇴근길 콘서트에서 실제로 들려준 연주다. 모두 국내 초연이었다. 인공지능은 작곡가로서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줬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달에서 가져온 암석’에 비유하며 미완성 교향곡의 혁신성을 높이 평가한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1929~2016)는 “슈베르트가 1, 2악장만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서 굳이 4악장까지 채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중국 화웨이의 의뢰를 받은 미국 작곡가 루카스 캔터는 인공지능을 활용해 나머지 3, 4악장을 마무리한 뒤 2019년 런던에서 ‘4악장 버전 미완성 교향곡’을 초연했다.

베토벤이 남긴 10번 교향곡 스케치 일부. 베토벤박물관/더 컨버세이션

클래식 작곡·편곡은 인공지능이 능력을 발휘하기에 용이한 분야로 꼽힌다. 음악회 해설을 맡은 조은아 피아니스트는 “수백 년간 축적된 방대한 데이터가 있고, 정형화된 화성법과 대위법, 수치화가 가능한 규칙적인 리듬과 일관된 조성이 있어서 클래식은 인공지능이 학습하기 좋은 장르”라고 했다. 오래된 클래식 작품은 저작권(작곡가 사후 70년)에서도 자유로운 편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완성한 미완성 교향곡은 초연에서 혹평을 받았다. 음악 전문지 ‘스트라드’는 “미학적으로 순진하다”고 평했다. 서울시향은 이번에 3악장을 연주했는데, 조은아 피아니스트는 “할리우드 영화처럼 허장성세가 느껴진다”고 꼬집었다. 이번 연주를 지휘한 데이비드 이는 “절대로 슈베르트일 수 없는 악구가 간혹 튀어나와 의문이 생기더라”며 “아예 틀렸거나 절대 나오면 안 되는 부분이 나올 때는 이게 뭔가 싶었다”며 웃었다. 서울시향 단원들은 형식미의 결핍을 지적했다.

인공지능의 작곡법은 입력과 변형이란 두 단계를 거친다. 박주용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는 “슈베르트 음악의 특징적인 음색과 리듬, 음정 등을 데이터로 입력하면 인공지능이 이를 다양하게 변형하면서 악보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했다. 미완성 교향곡 3, 4악장을 만든 인공지능은 슈베르트의 작품 90곡과 그에게 영향을 받은 후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학습했다.

서울시향이 임가진 제2바이올린 수석 협연으로 비발디의 ‘사계’ 가운데 봄을 연주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50년 뒤의 기후 데이터를 토대로 만든 작품도 함께 들려줬다. 서울시향 제공

베토벤은 마지막 9번 교향곡을 완성한 뒤 10번 교향곡 작업에 착수했으나 곧 생을 마감해 단편적 스케치만 남겼다. 250개의 음표와 40여개 악구로 된 선율을 연주하면 채 1분도 되지 않는다. 독일 도이치텔레콤은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은 2020년 카라얀연구소에 10번 교향곡 복원을 의뢰한다. 오스트리아 작곡가 발터 베르초바와 음악학자, 음악사학자, 인공지능 전문가들이 팀을 꾸렸고, 인공지능을 활용해 10번 교향곡을 완성했다. 서울시향은 이번에 3악장 스케르초를 연주했다. 스케르초는 대개 익살스럽게 흘러가는데 인공지능은 비장한 분위기의 독특한 스케르초를 선보였다. 5번 교향곡 ‘운명’의 1악장 도입부나 2, 3악장 주제들이 수시로 튀어나왔다. 데이비드 이 서울시향 부지휘자는 “5번 교향곡의 카피라고 느껴질 만큼 비슷했다”고 평했다. 단원들은 연주가 쉽지 않다고 입을 모았는데, 테크닉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곡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베토벤이 남긴 교향곡 10번의 스케치를 토대로 채보한 악보. 베토벤박물관/더 컨버세이션

서울시향은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의 1악장에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50년 뒤의 기후 데이터를 적용해 인공지능이 작곡한 곡도 들려줬다. 협연을 맡은 임가진 제2 바이올린 수석은 “화성 전개와 배열이 익숙하지 않았고, 마치 새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연주하기가 까다로웠다”며 “듣는 사람들이 그로테스크(기괴)하게 느끼고 ‘뭐지? 봄이 왜 이렇게 됐지?’라는 의문만 갖게 해도 성공한 연주일 것”이라고 했다.

인공지능의 작곡 실력에 대해선 의문부호가 붙지만 ‘협업 파트너’로서의 유용성은 인정하는 분위기다. 조은아 피아니스트는 “인간 음악가들은 화성법, 대위법 등 작곡의 기초체력을 익히는 데에 청춘을 많이 소진한다”며 “인공지능을 활용해 그런 시간을 단축하고 창조적인 영역에서 영감을 찾는 데에 도움을 받는다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박주용 교수는 “기술 자체가 사람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며 “기술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창의성을 더 잘 발휘하게 하는 도구”라고 강조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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