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배지·或배지부터 세월호 배지까지…‘금배지’ 변천사
“국민으로부터 외면받는 금배지 대신 헌법기관으로서 국민을 대표한다는 책임감의 상징이자 평화를 의미하는 태극기 배지를 달자.”
2016년 7월 백재현 당시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위원장은 국회의원 300명 전원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내 제안했습니다.
20대 국회 개원 직후 여야에서 총선 홍보비 리베이트 의혹, 가족 보좌진 채용 문제 등이 불거지자 특권을 내려놓자고 한 것입니다. 같은 해 10월 정세균 당시 국회의장이 이끌던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추진위원회’도 의원 세비를 줄이고 금배지를 달지 말자고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국회의원 특권의 상징으로 ‘금배지’를 들었습니다만, 사실 이 배지는 금이 아니라 ‘은 배지’입니다.
3일 국회사무처 설명을 보면, 배지의 99%는 은입니다. 여기에 미량의 공업용 금을 도금합니다. 순금이 아니니 가격도 비싸지 않습니다. 국회의원은 의원 등록 시 배지 1개를 무료로 받는데, 개당 3만5천원을 내면 추가 구매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를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대여하지 못합니다.
금배지는 처음엔 말그대로 금배지였습니다. 배지를 달기 시작한 2대 국회(1950~1954년)부터 10대 국회까지는 순금 2돈을 들여 진짜 금배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11대 국회(1981~1985년) 출범 전 전두환 군부의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배지 규칙을 개정해 “(성분을) 은으로 하되 금색으로 도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순금 배지는 과도한 특혜’라는 지적을 반영한 결과라는 해석도 있지만, 신군부가 국회 권위를 떨어뜨리려 한 결정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1981년 4월23일치 기사에서 “10여만원이 넘던 2돈쭝짜리 순금 배지는 2750원짜리 은 한 돈쭝 반에 금도금한 배지가 됐다. 조그마한 변화지만 상징적 의미가 크다”고 보도했습니다. 경향신문은 1981년 4월9일치 기사에서 “명예는 최고를 지향하지만 의원 각자의 마음가짐은 오로지 멸사봉공의 청교도적인 근검으로 가득 차야 한다는 계율을 담고 있는 것”이라 평가했습니다.
무궁화 모양인 배지 문양은 국회를 거듭하며 여러 차례 바뀌었습니다.
초기엔 무궁화 잎이 선의 형태였다가 1971년 8대 국회에 들어서면서 잎 안쪽이 가득 채워지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무궁화 정중앙에 적힌 글자도 한자(國)와 한글 ‘국’자를 오갔습니다. 5대, 8대 국회에선 한글 ‘국’자가 잠시 쓰였지만, ‘국’을 뒤집으면 ‘논’으로 보여 ‘노는 국회’로 비친다는 지적이 일자 다시 한자로 회귀했습니다.
그럼에도 한글 표기를 위한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17대 국회였던 2004년, 박병석‧박영선 열린우리당 의원은 배지 글자 표기를 한글로 바꾸는 규칙 개정안을 각각 발의했습니다. 박병석 의원은 한글 표기 필요성 중 하나로 “‘或’자가 ‘의혹’을 나타내는 단어라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박영선 의원은 ‘국회’를 한글로 표기하는 게 “미학적으로 균형을 갖춰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발의안은 폐기됐습니다.
‘국회’라는 한글 두 글자가 배지 정중앙에 자리 잡게 된 건 19대 국회였던 2014년의 일입니다. 2012년 당시 노회찬 통합진보당 의원의 개정안 발의를 시작으로 박병석 당시 국회부의장까지 개정안을 추가 발의해 힘을 실으면서 법안 통과가 가능했습니다. 당시 국회사무처가 국회의원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 232명 중 168명(72.4%)이 배지 한글화에 찬성했습니다. 당시 결정된 배지 모습은 22대 국회인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이라고 꼭 국회 금배지를 달지는 않습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금배지를 거의 달지 않습니다. 그는 2022년 8월 당 대표를 맡은 뒤로는 민주당 배지를 달았습니다. 지난해 3월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를 규탄하면서는 태극기 배지를 달았습니다. 이 대표 쪽 관계자는 “이미 권위의 상징이 되어버린 국회의원 배지보다 민주당·태극기 배지 착용을 선호하는 편”이라고 설명합니다.
광주 광산을이 지역구인 민형배 민주당 의원은 금배지 대신 ‘오월어머니’ 배지를 답니다. 오월어머니 배지는 1980년 광주항쟁 당시 머리에는 주먹밥이 든 광주리를 인 채, 한쪽 손엔 횃불을 들고 행진하는 여성의 모습입니다. 민 의원은 “국회의원 배지를 달면 ‘나를 알아달라’고 하는 것 같고, 쑥스러워서 잘 착용을 안 한다”며 “그러나 오월어머니 배지는 1980년 5월 광주 그 자체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지인들에게도 이 배지를 나눠줍니다.
배지로 의정 활동 각오를 담아내는 의원도 있습니다. 박주민 의원은 대표적인 여의도 ‘배지 부자’입니다. 그는 21대 국회에선 ‘세월호 나비 브로치’ ‘제주 4·3 동백꽃 배지’와 ‘여순 10·19 동백꽃 배지’ ‘이태원 참사 배지’ 등을 주렁주렁 달고 다녔습니다.
그는 배지와 관련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때마다 배지를 뗐습니다.
22대 국회가 개원한 지금, 박 의원 옷깃에 남은 배지는 세월호 배지가 유일합니다. 박 의원은 “피해자 유가족분들이 직접 달아준 배지들이라 (법안 통과) 약속을 지키기 전까지 떼기 죄송해 달고 다녔다”며 “다만, 세월호 관련 법안 대다수는 처리됐지만 당 세월호 특위 위원장이라 계속 달고 다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강재구 기자 j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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