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보다 낫네' 서울시의회는 주민 청원하면 폐기 불가
상정 후 1년 이내 시의회 본회의 표결 처리 의무
[서울=뉴시스] 박대로 기자 = 국민 5만명이 함께 청원하면 국회가 법안 처리를 논의하는 '국민동의청원제'가 유명무실화된 반면, 지방의회에서는 상대적으로 주민 청원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달 임기가 만료된 21대 국회에 접수된 국민청원은 110건이었지만 모두 방치되다 임기가 끝나며 폐기됐다. 유권자 5만명 이상으로부터 동의를 얻은 청원이지만 제대로 심사 한 번 하지 못한 채 종잇조각이 된 것이다.
차량 결함 입증 책임을 소비자가 아닌 제조사가 갖도록 하는 이른바 '도현이법(제조물책임법 개정안)' 등이 국회의원들에 외면 당한 대표적인 사례다.
이에 따라 국민의 입법 과정 참여를 보장하고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마련된 국민청원제도가 유명무실해지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국회가 국민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는 반면, 지방의회는 상대적으로 청원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전국 각지 지방의회는 주민조례청구 제도를 운영 중이다. 이는 일정 수 이상 주민의 연대서명으로 지방의회에 주민이 직접 만든 조례안을 발의할 수 있는 제도다.
주민들이 연대서명을 마친 청구인 명부를 제출하면 지방의회 의장은 서명 유·무효 확인 절차 종료 후 유효가 확인되면 해당 조례를 의무적으로 발의해야 한다.
서울시민을 대표하는 서울시의회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서울시의회는 2021년 자치법규를 정비해 주민조례청구권자 수를 2만5000명 이상으로 줄였다.
주민조례발안에 관한 법률은 주민조례청구를 위한 연대서명자 수를 18세 이상 서울 시민의 0.5% 이내에서 조례로 정하도록 했지만 서울시의회는 주민 참여 활성화를 위해 0.3% 수준인 2만5000명으로 하향 조정해 문턱을 낮췄다.
이렇게 서울시민 2만5000명 이상 서명을 받아 시의회에 청구되는 조례 제정·개정·폐지안은 시의회가 반드시 심의해야 한다. 국회 청원안이 의원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되는 것과 달리 서울시민이 서울시의회에 청구한 조례안은 임기가 끝나도 폐기되지 않고 상임위원회에 남는다.
게다가 주민청구조례안은 수리된 날부터 1년 이내에 본회의에서 투표에 부쳐져야 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본회의 의결로 1년 이내 범위에서 연장할 수 있지만 이 역시 한 차례로 한정된다.
이렇게 주민의 조례 청구 권한을 강화하자 찬반이 엇갈리는 서울 시내 주요 사안과 관련해 주민이 주도권을 쥐는 사례가 나오기 시작했다.
'서울특별시 학생인권 조례 폐지조례안'은 주민조례발안제도 시행 후 서울시의회에 발의된 제1호 주민청구조례였고 지난해 3월 시의회 교육위원회에 회부됐다.
이후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찬반 논쟁에 불이 붙었다. 260여개 진보성향 시민단체들이 꾸린 '서울학생인권조례지키기 공동대책위(공대위)'는 같은 해 4월 서울시의회를 상대로 주민청구조례에 위법성이 있다며 수리와 발의 무효를 확인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와 함께 이 단체들은 서울행정법원에 주민청구조례에 대한 수리·발의 집행 정지를 요청하는 가처분을 신청했다. 같은 해 12월 서울행정법원이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며 학생인권 조례 폐지조례안 심의가 불가능해졌다.
그러자 국민의힘이 다수당인 서울시의회는 특위를 통해 의원 발의 형태로 또다른 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을 발의했고 이는 지난 4월 본회의에서 국민의힘 주도로 의결됐다.
이후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의결한 서울시의회에 재의를 요구하며 '거부권'을 행사해 학생인권조례가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국민의힘은 본회의에서 재차 의결할 태세다.
학생인권조례 찬반 여부를 떠나서 이 같은 일련의 사태는 주민청구조례가 서울시와 시의회의 의사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외에 '서울특별시 장애인 탈시설 및 지역사회 정착지원에 관한 조례 폐지조례안' 역시 서울시민 2만7435명이 청구해 만들어진 조례다.
이 조례의 내용은 2022년 서울시의회에서 제정된 '서울특별시 장애인 탈시설 및 지역사회 정착지원에 관한 조례(이하 장애인 탈시설 조례)'를 폐지하자는 것이다.
기존 조례에는 서울시 관할 거주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이 시설을 떠나 지역 사회에 정착할 수 있게 돕는다는 내용이 담겼는데, 이에 대해 청구인은 "해당 조례는 의사 표현도 힘든 중증장애인들을 자립이란 명분으로 지원주택으로 내몰고 있는 탈시설 정책을 지원하려고 만든 조례다. 중증장애인의 거주환경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며 폐지를 요구했다.
이후 입법예고 절차 때 5620건에 달하는 찬반 의견이 쇄도할 정도로 논쟁이 치열했다. 조례를 폐지하라는 장애인 부모 쪽과 조례를 유지해야 한다는 장애인 단체들이 맞섰다.
지난 3월 서울시의회 보건복지위원회에 상정된 이 조례는 상임위 심사를 앞두고 있다. 심사 결과가 어떻든 이 조례는 시의회 본회의에 회부돼 표결에 부쳐질 예정이다.
이처럼 주민이 직접 조례 처리에 참여하면서 일각에서는 '포퓰리즘'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지만 실제로 검증 절차에 의해 걸러지는 안건이 많다.
'서울특별시 청년참여 활성화 지원조례 일부개정 청구', '서울특별시교육청 청소년 유해약물 예방교육 조례 제정 청구', '미디어재단 티비에스(tbs) 설립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정 청구', '서울특별시 공공보건의료에 관한 조례 개정 청구', '서울시 취약주거시설 전면실태조사 의무화에 관한 조례 제정 청구', '서울특별시 미세플라스틱 저감 지원 조례 제정 청구' 등이 모두 청구인 명부 미제출을 이유로 발의되지 못하고 각하됐다.
☞공감언론 뉴시스 daero@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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