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억대 소송부터 인테리어 비용 수천만원까지…줄줄 샌 정치후원금
한 끼 식사에 250만원, 프로필 촬영에 500만원…불명확한 기준에 느슨한 감시가 문제 키워
(시사저널=이원석·구민주·변문우 기자)
지지자들이 '좋은 정치를 해달라'는 취지로 국회의원에게 보낸 정치후원금은 과연 어떻게 쓰일까. 정치인들이 정치활동을 위해 지출하는 비용인 정치자금의 대부분은 정치후원금으로 채워진다. 국회의원은 연간 1억5000만원의 후원금을 모을 수 있다. 선거가 있는 해에는 3억원까지 가능하다.
정치인들이 후원금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자금법은 정치자금의 지출에 대해 '국민의 의혹을 사는 일이 없도록 공명정대하게 운영되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또 '정치활동을 위하여 소요되는 경비로만 지출하여야 하며, 사적 경비로 지출하거나 부정한 용도로 지출하여서는 안 된다'고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치활동'과 '사적 경비'는 '해석의 영역'이다. 어디까지가 정치활동이고 어디까지가 사적 경비인지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후원금 지출을 더 구체적으로 제한하지 않은 것은 정치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차원도 있다. 그러나 이 점이 오히려 법의 허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매번 나온다. 일부 국회의원과 정치인이 일반 상식에서 벗어난 용도로 정치자금을 사용해서다. 지난해에는 과연 어땠을까. 시사저널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21대 국회의원(사직 의원 포함) 전원의 2023년 정치자금 회계 자료를 단독 입수해 들여다봤다.
개인 비리 의혹도 정치자금으로 방어
지난해 의원들의 정치후원금 지출에서 눈에 띄는 용처 중 하나는 변호사 선임료 등 소송 비용이다. 지난해 10여 명의 의원이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1억원 넘는 소송 비용을 정치자금으로 냈다. 이 중 1000만원 넘게 소송 비용을 낸 의원은 모두 7명이었다.
가장 많은 비용을 쓴 의원은 김선교 국민의힘 의원이다. 그는 지난해 5월 변호사 선임료로 두 곳의 로펌에 총 1억5800만원을 냈다. 김 의원이 이를 지불한 건 지난 21대 총선 당시 정치자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재판에서 자신은 최종 무죄 판단을 받았지만, 회계책임자가 벌금 1000만원을 확정 판결받으면서 의원직이 박탈된 직후다. 김 의원은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선관위에서 회계 책임자의 유죄로 인한 당선 무효형은 정치후원금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은 지난해 1월 4400만원을 변호사 선임료로 지출했다. 신 전 의원 측 관계자는 통화에서 "이태원 참사 때 고발당한 건에 대해 사용한 내역"이라고 밝혔다. 의사 출신인 신 전 의원은 2022년 10·29 이태원 참사 당시 현장 구조에 투입된 '닥터카'에 탑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시민단체로부터 고발됐고, 직권남용 등 혐의로 검찰에 송치된 상태다. 황보승희 자유통일당 전 의원도 소송 비용으로 3300만원을 지출했다. 황 전 의원은 임기 중 불거진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기소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황 전 의원은 통화에서 "지금 진행 중인 재판을 위해 쓴 것이 맞다. 그렇게 사용해도 되는지 다 확인해 보고 쓴 거라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실제 선관위는 정치활동과 관련한 소송에 대한 비용이라면 정치자금으로 지출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어디까지가 정치활동인지 그 기준점이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정치활동과 개인 비리 의혹이 뒤엉켜 있는 경우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시민입법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지웅 변호사는 통화에서 "정치자금의 목적상 정치활동 중에 불가피하게 생긴 소송에 대해서는 지출을 허용할 수 있더라도, 개인 비리라든가 개인 잘못으로 생긴 사건에 대해 사용하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하다고 본다"며 "또 정치자금으로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리거나 과도하게 사용하는 경우도 공정하고 투명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정치자금법의 취지와 맞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다만 정치자금으로 소송 비용을 썼을 경우에 최종적으로 유죄가 확정될 때엔 국고로 반환하게 돼있다. 최근 이와 관련한 문제가 분쟁으로 번진 일도 있었다. 홍철호 현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21대 총선 관련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변호사 선임료 5000만원을 정치자금으로 충당했다. 선관위는 홍 수석의 벌금형이 확정되면서 소송 비용의 국고 귀속을 요구했지만, 홍 수석은 부당하다며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해당 재판에서 홍 수석은 2심까지 패소한 상태다. 김선교 의원의 경우엔 본인이 무죄라고 해도 결과적으로 당선 무효가 된 것인데도 선관위가 정치자금으로 소송 비용을 낼 수 있도록 한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민사 손해배상 비용을 정치자금으로 지출한 경우도 있었다. 김용민 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9월 '21대 총선 소송 관련 배상액 지급'이란 명목으로 709만원을 정치후원금에서 지출했다. 김 의원 측 관계자는 "21대 총선 때 자연재해로 돌풍이 불면서 (선거 홍보용) 입간판이 쓰러지면서 주변 상가들에 손해를 끼쳤고, 그 피해 보상 건으로 지출하게 됐다"며 "선관위로부터 (사용 가능) 확인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화장품 판매업체에 정치 여론조사 용역?
의원들이 정치자금을 많이 사용하는 용도 중 하나는 여론조사나 컨설팅 비용이다. 올해 총선을 앞두고 있던 때라 지난해에는 특히 여론조사나 컨설팅을 맡긴 의원이 많았다. 이와 관련해 논란이 불거진 지점 중 하나는 정파성이 강한 특정 여론조사·컨설팅 업체와 계약을 맺는 의원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민주당에서 특히 많았는데, 지난해에도 친민주당 성향으로 평가되는 특정 업체 두 곳에 1000만원 이상 비용을 들여 여론조사·컨설팅을 맡긴 민주당 의원이 다수 있었다. 그중 한 업체의 대표는 지난해 민주당에서 당직을 맡아 이해충돌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원욱 개혁신당 전 의원은 지난해 11월 '정치 정책 여론조사' 명목으로 1100만원을 지출했다. 그런데 비용을 지불한 대상은 화장품, 치약 등을 판매하는 중소 건강식품 업체였다. 이 전 의원 측 관계자는 "업체 대표가 옛날에 여론조사 업체를 운영했던 데이터 분석 전문가이고 현재도 그 업무를 겸업하고 있어서 의뢰를 한 것"이라며 "선관위에도 조사 결과지를 제출해서 문제 없이 지출 처리가 됐다"고 설명했다. 다만 해당 업체 등기부등본상에는 업종에 여론조사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정치후원금이 가장 많이 쓰이는 또 하나의 항목은 식대다. 지난해에도 간담회, 회의 등의 명목으로 식당에서 쓴 비용이 상당한데, 일부는 금액이 과도하거나 최고급 식당에서 지출됐다. 김승남 민주당 전 의원은 지난해 2월19일 '보좌진 전체회의' 명목으로 지역구인 전남 고흥의 한 웨딩홀 뷔페에서 250만원을 사용했다.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서울 한 호텔의 고급 일식집에서 '정책 간담회' 목적으로 128만4000원을 썼다. 해당 일식집은 가장 저렴한 '도시락' 메뉴가 16만5000원으로 확인된다. 정진석 현 대통령비서실장은 11월23일 여의도 한 한우집에서 기자간담회 명목으로 100만8000원을 지출했다.
의원들의 외모 단장 및 사진 촬영에도 정치자금이 쓰였다. 장제원 국민의힘 전 의원은 지난해 5월 '프로필 사진 촬영비 및 메이크업' 비용으로 505만원을 정치자금으로 사용했고, 김용민 민주당 의원도 6월 '프로필 사진 촬영 의상 대여 및 스타일링'에 198만원을 썼다.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20여 차례 미용실에서 '헤어 단장' 명목으로 총 70만원 넘게 지출했다.
"정치자금법, 제3의 독립기구가 만들어야"
의원들은 정치활동을 위해 국회에 있는 사무실 말고도 지역 내에도 사무실을 둔다. 이 사무실 또한 대부분 정치자금으로 운영되는데, 지난해에는 특히 비례대표 의원 대다수가 지역사무실을 임차하면서 새롭게 비용을 지출했다. 비례의원들도 대부분 지역구에서 재선을 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쓰인 비용이 상당했다. 보증금과 월세, 인테리어 등에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쓰였다.
'기부금을 기부하는' 행위도 여럿 포착됐다. 선관위에서 별다른 제한을 하지 않고 있지만, 이는 정치후원금을 낸 지지자의 의도가 훼손될 수 있다는 점, 이해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 기부금 500만원을 정치기부금으로 쾌척했다. 김영진 민주당 의원은 자신이 이사장을 지냈던 '한국정학연구소'라는 사단법인에 300만원을 후원했다. 이 외에도 의원들 간에 서로 기부금을 보내는 '품앗이' 행태가 여럿 나타났으며 자신이 속한 당내 연구단체에 수십만에서 수백만원의 회비나 기부금을 내기도 했다.
하승수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는 "현재 정치자금 지출에 대한 규제가 명확하지 않고 너무 허술하다. 선관위 유권해석도 거의 다 쓸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하다 보니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외부의 감시라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고 통제 불능 상태"라며 "가장 큰 문제는 이 정치자금법도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만든다는 건데 이러한 법을 만들 때는 제3의 독립기구가 안을 만드는 등의 필요가 있다"고 견해를 밝혔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선관위의 조사·감시 기능을 대폭 강화해야 하고 위반이 적발될 경우엔 몇 배에 달하는 과징금을 물리는 등 강력한 조치가 취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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