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화와 전동화로 ‘쿨한 현대차’ 변신… 미래 모빌리티 이끈다 [2024 재계 인맥 대탐구]
현대차그룹 글로벌 판매 3위 순항
1998년 주변 만류에도 기아 인수
최단 기간에 법정관리 탈출 기록
정몽구 ‘품질 경영’으로 체질 개선
정의선 ‘디자인 경영’으로 더 도약
제네시스 성공시켜 고급화 완성
전기차 플랫폼 E-GMP 개발 호평
낮은 지분율·GBC 암초 등 풀어야
“현대차그룹은 어떻게 그렇게 ‘쿨’해졌나.”
지난해 5월 22일(현지시간)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 같은 제목의 기사를 통해 “과거 저가 브랜드로 알려져 있던 현대차·기아가 경쟁사들을 긴장하게 하는 전기차 혁신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평했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미국 시장의 ‘언더독’(경쟁에서 열세에 있는 약자)이었던 현대차그룹이 전기차의 정체성 그 자체인 테슬라에 도전장을 내밀 만큼 빠르게 성장했다는 것이다. WSJ는 신속한 의사결정 시스템과 적극적인 인재 영입을 바탕으로 전동화(기존 내연기관 자동차의 동력원을 전기장치로 전환하는 것)에 발빠르게 대처한 것을 비결로 꼽았다.
●美시장 언더독서 전기차 선도기업으로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전 세계 시장에서 전년 대비 6.7% 증가한 약 730만 4300대를 팔아치우며 2022년에 이어 지난해에도 자동차 판매량 세계 3위를 수성했다. 지난해 현대차와 기아의 영업이익은 각각 15조 1270억원, 11조 6080억원으로 합산 26조원을 넘어서며 역대 최대 기록을 새로 썼다. 올해 1분기에도 현대차는 모두 100만 6767대를 판매하며 역대 1분기 중 최대 매출인 40조 6585억원, 영업이익 3조 5574억원을 기록했다. 기아도 같은 기간 76만 515대를 판매, 매출 26조 2129억원, 영업이익 3조 4257억원으로 역대 최대 분기 영업이익을 달성하는 등 순항 중이다.
역설적이게도 WSJ가 언급한 신속한 의사결정 시스템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정몽구(86) 현대차그룹 명예회장 시절의 수직적인 조직문화의 영향이라는 분석이다. 현대차그룹이 현재와 같은 형태가 된 건 2000년이다. 앞서 정몽구 명예회장은 글로벌 자동차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볼륨을 키워야 한다는 판단으로 1998년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정관리에 들어간 기아를 인수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후 인수 첫해인 1999년에 기아를 흑자 전환하는 데 성공했고 2000년 2월 인수 15개월 만이라는 사상 최단 기간 내 법정관리 체제에서 벗어난 데 이어 같은 해 9월 현대차, 기아차(현 기아),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 등 10개 계열사를 이끌고 현대그룹에서 독립, 국내 최초의 자동차 전문그룹인 현대자동차그룹을 출범시켰다.
●정몽구, 아들을 오너 아닌 경영인으로
정 명예회장은 그룹 출범 직후 ‘품질경영’을 앞세우며 글로벌 완성차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기초체력을 길렀다. 이전까지 현대차는 미국 등에서 ‘싼 값에 타는 차’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정 명예회장은 생산, 영업, 사후서비스(AS) 등 부문별로 나뉘어 있던 품질 관련 기능을 묶어 품질총괄본부를 만들고 품질관리를 진두지휘했다. 이에 힘입어 2004년 현대차는 미국 컨설팅업체 JD파워의 신차품질조사(IQS)에서 사상 처음으로 도요타를 제치며 일반 브랜드 부문 4위에 오르는 등 변화의 시작을 알렸다.
정 명예회장은 또 아들 정의선(54) 현대차그룹 회장을 ‘낙하산 오너’가 아닌 경영인으로 키우는 데 공을 들였다는 후문이다. 일례로 정 회장이 2005년 사장직에 오를 당시만 해도 기아는 적자에 허덕이던 ‘험지’였다. 정 회장은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는 피터 슈라이어 전 아우디 수석 디자이너를 직접 영입하며 ‘디자인 경영’을 표방, 기아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
2015년 11월 출범한 고급차 브랜드 제네시스도 정 회장의 작품이다. 제네시스 초기 기획 단계부터 외부 인사 영입, 조직개편 등 모든 과정을 정 회장이 기획하고 주도한 야심작으로 꼽힌다. 제네시스는 출범 8년 만인 지난해 전 세계 판매량 100만대를 넘어서는 등 현대차 고급화의 일등 공신으로 자리매김했다.
●로보틱스·자율주행 등 미래 먹거리로
2020년 회장에 취임한 정 회장은 외부인재를 적극 영입하고 기술개발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면서 기존 내연기관차의 문법을 적극적으로 바꿔 나가고 있다. 전동화라는 전 세계 자동차 산업의 격변이 오랜 기술과 노하우를 가진 기존 완성차 업체들을 앞설 수 있는 기회라는 판단에서다.
그 첫 단추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 개발이었다. 정 회장 취임 직후였던 2020년 12월 현대차그룹은 차세대 전기차 라인업의 뼈대가 된 E-GMP를 전 세계에 공개했다. 정 회장은 제품 개발 초기부터 주요 단계마다 직접 점검하며 각별히 공을 들였고 E-GMP 기반 신형 전기차 모델들은 잇따라 호평을 받으며 현대차·기아가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서 선도 기업으로 올라서는 데 일조했다. 현대차그룹은 전동화뿐 아니라 로보틱스, 자율주행, 미래항공모빌리티(AAM), 소프트웨어중심차량(SDV), 수소생태계 등 다양한 신사업으로 미래모빌리티 기업으로 도약한다는 목표다.
올해로 회장 취임 4년차를 맞았지만 아직 그룹 지배력이 부족한 것은 풀어야 할 숙제다. 이와 맞물려 순환출자 구조 해소도 당면 과제로 남아 있다. 순환출자 구조에서는 특정 계열사의 문제가 다른 계열사에도 연쇄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국내 10대 기업 중 유일하게 현대모비스(21.86%)→현대차(34.16%)→기아(17.54%)→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를 가지고 있다.
●순환출자 해소는 산 넘어 산
정 회장은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현대모비스 지분을 0.32%만 보유하고 있다. 현대모비스의 개인 최대주주는 정몽구 명예회장(7.24%)이다. 정 회장은 현대모비스 외에 현대차 2.67%, 기아 1.76%, 현대글로비스 20%, 현대위아 1.95%, 현대오토에버 7.33%, 이노션 2.0% 등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정 회장이 그룹 지배구조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현대모비스 지분 확보가 절실하다. 정 명예회장의 지분을 증여받거나 현대모비스 지분을 추가 매입하는 방안이 꼽히지만 양쪽 다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정 명예회장의 지분을 증여받으면 최소 7000억원이 넘는 세금을 내야 한다. 이렇게 증여를 받더라도 정 회장의 지분율은 8%가 채 안 되는 수준에 그친다. 정 회장이 기아(17.54%), 현대제철(5.88%), 현대글로비스(0.7%)가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을 모두 매입할 경우 기존 지분을 합해 지분율 24.28%로 최대주주에 오를 수 있지만, 이 역시 6조원에 달하는 거금이 필요하다는 계산이다.
현대차그룹이 현대모비스 사업부 일부를 인적분할해 신설법인은 다른 계열사와 합병하고 존속법인은 지주사로 만드는 등의 지배구조 개편안 시나리오도 나온다. 이 경우 정 회장은 다른 계열사 지분을 매각해 새 지주사 지분율을 높일 수 있고 순환출자 고리도 해소할 수 있다. 실제로 현대차그룹은 2018년 현대모비스를 투자·핵심부품 사업부문과 모듈·애프터서비스(AS) 부품 사업부문으로 쪼갠 뒤 모듈·AS 부품 사업부문을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지배구조 개편안을 공개했으나 당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의 반대로 무산됐다.
정 명예회장의 숙원사업이었던 글로벌 비즈니스 콤플렉스(GBC) 건립도 암초에 부딪힌 상황이다. 2014년 현대차가 당시 4조원을 베팅한 삼성전자와의 경쟁 끝에 약 10조 5500억원을 들여 서울 강남구 삼성동 옛 한국전력 부지를 매입하며 시작된 GBC 사업은 유관 부처 간 입장 차로 수년간 공사가 지연돼 왔다. 최근에는 현대차그룹이 당초 계획이었던 105층 타워를 55층 건물 2개로 수정하는 과정에서 서울시와의 의견 대립에 부딪힌 상태다. 현대차그룹은 디자인 변경일 뿐이라는 입장이지만 시는 고층 랜드마크 건물 건립을 전제로 공공기여금 협상이 이뤄졌던 만큼 핵심 내용 변경에 따른 재협상이 필요하다고 맞서고 있다.
김희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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