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 조립하던 대만, AI 시대 심장 됐다
지난 2일 밤 대만을 대표하는 초고층 빌딩 ‘타이베이101′ 외벽에 ‘컴퓨텍스 2024′ ‘AI로 연결’이라는 대형 글귀가 등장했다. 빌딩 앞 거리는 엔비디아 티셔츠 기념품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인근 대만국립대 체육관에서 열린 엔비디아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의 연설을 듣고 나온 이들이다. 이날 체육관에는 대만 출신의 황 CEO를 보기 위해 장맛비를 뚫고 6000여 명의 청중이 모였다. 아이폰을 생산하는 폭스콘의 류양웨이 의장, 세계적 서버 제조사인 수퍼마이크로의 찰스 리앙 회장, 대만의 전자 제조업체 HTC의 왕쉐홍 회장 등 대만 대표 기업인들도 그 속에 있었다. 이들 앞에서 황 CEO는 “대만과 우리의 파트너십이 세계 AI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고 했다.
4일 아시아 최대 IT 박람회 컴퓨텍스 2024 개막을 앞두고 대만 수도 타이베이로 세계적 테크 기업 인사들이 몰려들고 있다. 엔비디아뿐 아니라 AMD·인텔·퀄컴·ARM 등 세계 반도체 빅테크 기업들의 CEO와 창업자가 총출동했다. 3일 기조연설을 한 리사 수 AMD 회장은 직접 AI 가속기 신제품을 공개했고,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CEO는 “PC가 (AI로) 새롭게 태어날 전환기”라고 했다. ‘반도체 별’들이 모이면서 행사 규모도 역대 최대다. 주최 측은 “26국, 1500곳 이상 기업이 참가하며 관람객은 5만명에 달할 것”이라고 했다.
대만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노트북이나 전자시계 등을 조립·생산하는 아시아 IT 산업의 생산 기지 수준에 머물렀다. 중국의 위협으로 지정학적 리스크에 노출돼 있다. 하지만 지금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와 설계, 패키징(조립) 등 최첨단 분야 최정상에 군림하며 ‘AI 인프라 허브’로 부활하고 있다. 경제도 호황이다. 대만경제연구원은 지난 4월 경제성장률을 3.14%에서 3.29%로 상향 조정했다. 증시도 사상 최고치를 경신 중이다.
/타이베이·신주(대만)=장형태 기자
지난 2일 오후 대만 수도 타이베이에서 80km 떨어진 신주현 바오산향. 타이베이가 AI 반도체 축제 열기로 후끈했다면, 이곳은 휴일 우중에도 반도체 공장 건설 열기로 가득했다.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1위인 TSMC가 내년 2나노(10억분의 1)미터 공정으로 칩을 양산하기 위해 거대 반도체 공장 ‘팹 20′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한쪽에서는 건물을 올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산을 깎아 평탄화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주변으로는 도로 확장 공사도 진행 중이었다. 신주현 정부는 지난달 25일 “TSMC 새 공장으로 고용과 교통량이 증가할 것에 대비해 인근 도로 9곳을 확장하는 공사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공사 현장 건너편에는 TSMC의 본사와 연구개발 중심 역할을 하는 ‘팹 12′가 있다. 이곳 반경 4km 안에 있는 TSMC 공장만 5곳이다. TSMC 팹(공장) 사이사이로 UMC(파운드리 세계 3위), 미디어텍(모바일 AP 점유율 1위) 같은 대만 기업들이 모여 있었다. 신주에는 기업뿐 아니라 대만 반도체 산실인 국책 연구기관 대만공업기술연구원과 대만 칭화대·교통대 등 7개 대학이 반도체 R&D를 뒷받침한다. 흔히 대만은 ‘TSMC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신주를 보면 선입견이 단번에 바뀐다. TSMC를 중심으로 반도체 설계와 후공정(패키징) 등 각 분야에서 세계 최정상에 있는 기업들이 탄탄하게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파운드리·후공정 1위, 설계 2위
대만은 반도체 제조의 모든 주요 공정이 자국 내에서 이뤄진다. 글로벌 테크업계에선 ‘반도체의 섬(silicon island)’이라 부른다. 반도체 설계(팹리스) 세계 2위, 비메모리 제조(파운드리) 세계 1위, 후공정(패키징 및 테스트) 세계 1위다. 미디어텍·리얼텍 같은 팹리스 업체가 주문한 반도체를 TSMC·UMC 등 파운드리 업체가 제조하고, ASE 같은 후공정 기업이 패키징과 테스트를 전담하는 모든 단계가 다 이뤄지는 수직적 분업 구조를 갖춘 것이다. 메모리 제조에만 편중된 우리나라와는 다르다.
역시 중심에는 TSMC가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스마트폰용 AP(두뇌역할을 하는 칩), 차량용 칩 등 10나노(10만분의 1미터) 이하 첨단 공정의 압도적 기술력으로 시장을 이끈다. 또 다른 파운드리 업체 UMC는 14나노 이상 구형 공정에서 디스플레이·차량용 반도체를 생산하며, 세계 파운드리 시장 6%를 점유하고 있다.
반도체 설계와 제조가 전공정이라면, 만든 칩을 패키징()하고 검사(테스트)하는 분야가 후공정이다. 최근 AI 반도체 생산에서 가장 중요하게 간주되는 분야다. 대만 ASE가 글로벌 1위 기업이다. TSMC가 엔비디아 등에서 주문을 받아 생산한 시스템(비메모리) 반도체를 ASE 같은 기업이 패키징한다. TSMC가 일본 구마모토에 지은 반도체 공장 두 곳 근처에 ASE도 패키징 공장 설립을 추진 중이다.
TSMC 본사 바로 옆에 있는 미디어텍은 세계 스마트폰용 AP 칩 점유율 1위 기업이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산 스마트폰, 갤럭시 중저가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칩을 설계한다.
◇국가 주도 출발... 산업 생태계 확장
대만의 ‘AI 인프라 생태계’가 형성된 과정을 보면, 대만의 패권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 대만의 반도체 산업은 198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PC 보급에 맞춰 대만 팹리스 기업들은 PC 부품용 반도체 설계에 나섰다. 대만 정부가 직접 나서 이렇게 설계한 반도체를 자국 파운드리 업체에 맡기도록 했다. 모리스 창 당시 대만 공업기술연구원장이 파운드리 전문기업 TSMC를 세운 것도 1987년이다.
대만 주요 반도체 기업들은 신주·타이난·가오슝 등 ‘과학단지’에 뭉쳐 시너지를 낸다. 이렇게 성장하면 ‘분사’를 통해 산업 생태계를 확장했다. 미디어텍과 노바텍은 애초 파운드리 기업 UMC의 설계 사업부로 시작했다. 고객사들이 설계 노하우가 UMC로 흘러들어갈 것을 우려하자,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독립 회사로 분사시킨 것이다.
대만 반도체 생태계는 ‘AI 인프라’를 매개로 질적 도약을 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AI 가속기, TSMC의 파운드리 이외에 폭스콘과 수퍼마이크로 등이 AI 서버용 컴퓨터 생산에서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AI 서버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은 기가바이트 등 대만의 정통 강소기업들이 책임진다. 테크 업계 관계자는 “대만 기업들은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다가도, 공동의 이익을 위해선 서로 협력하고 끌어주는 문화가 있다”며 “대만 테크기업의 창업주와 CEO들이 학연·지연·혈연으로 얽혀 있는 것도 그런 이유가 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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