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성장 이전 밑바닥 알려주는 1958년 ‘부흥백서’, 아직 소중한 자료

유석재 기자 2024. 6. 4.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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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대사 보물] [54] 김진현 전 과학기술처 장관
김진현 전 과기처 장관이 기자 시절부터 소장해 온 1958년과 1959년의 ‘부흥백서’와 1962년의 ‘경제백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박상훈 기자

김진현(88) 세계평화포럼 이사장을 조선일보 인물DB에서 검색하면 경력 사항이 100건이 훌쩍 넘는다. 언론인 출신으로 노태우 정부 때 과학기술처 장관이 됐으며 서울시립대 총장과 문화일보 회장을 지냈다. 한국경제연구원 신설을 시작으로 해양·과학·기술·미래 등 10개 연구기관 창설의 책임자였다. 세계화추진공동위원장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이었고 이봉창·안재홍·장준하 기념사업회의 창립 회장이었다. 우리 사회의 나아갈 길에 대해 끊임없이 ‘쓴소리’를 하는 원로 중 한 명이기도 하다.

1953년, 경주行 여행 증명서

곧 판교 이전을 앞둔 서울 서초구의 어수선한 사무실에서 그는 먼저 1950년대의 증명서 하나를 꺼내들었다. ‘단기 4286년 7월 22일’이라 적힌 여행증명서는 서기 1953년 당시 부산에 피란 가 있던 양정고의 교장 도장이 찍힌 문서다. 여행 구간은 부산에서 경주 왕복으로 적혀 있다. 국내 여행을 다니는 데 증명서가 필요했다고? 김 이사장은 “6·25 전쟁 때는 거주지를 벗어나려면 소속 기관이 발급한 여행증명서가 필요했다”고 회고했다.

이때 김진현 이사장은 고교 3학년이었다. 양정고 운영위원장(지금의 학생회장)이었던 그는 휴전 회담이 열려 이대로 전쟁이 끝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전쟁의 결말은 당연히 통일이어야 했습니다. 월남한 이북 출신 친구들은 ‘그럼 고향으로 다시는 못 돌아간단 말인가’라며 눈에 불이 붙으려 하더군요.” 학생들을 모아 부산에서 격렬한 휴전 반대 시위를 열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통일 없는 휴전 결사 반대’ 피켓을 들었고, 다방에서 차 마시던 시민들까지 끌고 나와 시위에 동참시켰다.

6·25 전쟁 중인 1953년 7월 22일 양정고 교장의 도장이 찍힌 ‘여행 증명서’. /김진현 이사장 제공

그러나 끝내 휴전과 재(再)분단의 비극적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학교가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그는 ‘돌아가기 전에 우리 민족의 자취가 서린 경주를 돌아봐야겠다’ 생각하고 학교에 신청해 여행증명서를 얻었다. 나름 비장한 경주행(行)이었다.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큰 뜻은 그 어려운 전쟁 시기를 지낸 동년배들 모두 품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1958년, 정부가 낸 ‘부흥백서’

해방 전 신문사 판매 지국을 운영하던 부친의 영향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늘 신문을 읽으며 성장했다. 어린 그가 보기에 신문기자는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서울대 사회학과에 진학한 뒤에도 언론에 대해 혼자 공부했고 1957년 말 연합신문에 입사했다. 그리고 경제부 기자로서 정부 부처 중 부흥부에 출입했다.

“그때는 우리 부흥부 장관이 미국 측 대한(對韓) 원조 조정관과 1주일에 한 번 회담하는 것이 주요 뉴스였어요.” 자유당 시절엔 국내 예산의 반 이상, 심한 경우 60~70%까지 미국 원조에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부에서 발표하는 내용이 어쩐지 충분하지 못한 듯해 미국 측으로부터 원문을 받아 보니 훨씬 자세한 내용이 있어 기사를 더 충실히 쓸 수 있었다. “그때부터 오리지널 텍스트(원자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껏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정부가 1958년과 1959년 발간한 ‘부흥백서’, 그리고 1962년에 낸 ‘경제백서’다. “부흥백서는 1958년 처음 나온 책이기 때문에 그때까지의 한국 경제 상황을 수록한 책입니다. 그리고 1960년과 1961년엔 나오지 않았다가 1962년에 다시 경제백서를 내게 되죠.” 낡은 책이지만 곳곳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어 여전히 참고자료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례로 1950년대 중반에는 인플레가 26~28%에 달했다는 것인데 “그 후 경제 성장의 출발점이 된 우리의 밑바닥 상황이 과연 어땠는지 증언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자료를 소중히 여기는 습관 덕에 시간이 지난 1965년 박정희·존슨 회담에서 뜻밖의 특종을 하게 됐다. 다들 별 관심이 없었던 ‘미국이 한국의 과학기술 연구를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1990년, 크렘린의 한·소 정상 사진

1990년 9월 30일 한·소 수교가 이뤄졌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 외교’가 가장 큰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의 사무실엔 그 직후인 12월 14일 소련의 모스크바 크렘린궁 예카테리나 훈장 홀에서 양국 대통령인 노태우·고르바초프가 한·소 국교 정상화 협정서에 서명하는 사진이 보관돼 있다. 노 대통령 바로 뒤에 서 있는 사람이 당시 과기처 장관이던 김진현이다.

1990년 12월 14일 소련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노태우(왼쪽 앉은 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국교 정상화 협정서에 서명하는 사진. 노 대통령 뒤에 서 있는 사람이 김진현 과기처 장관이다. /김진현 이사장 제공

그는 이 무렵 세 차례 한·소 과학기술장관 회담을 열며 초기 한·소 교류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다. 이때 소련의 원자력 관련 기관의 수장이 회의 전에 갑자기 한숨을 쉬더니 “요즘 들어 가스 요금이 30배나 올랐는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며 하소연하더라고 했다. 길게는 1년까지 연구원 월급이 밀릴 정도로 심각했던 경제난 때문에 ‘무슨 기술이든 다 한국에 갖다 팔아야 한다’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비화도 있었다. 소련의 과학기술 관련 기관장 한 명이 진지한 표정으로 “사실은 원자력으로 작동하는 비행기를 연구하고 있는데 한국도 동참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항공유 대신 원자력을 쓰면 기체가 훨씬 가벼워졌겠지만, 그는 ‘연료가 유출돼 핵 사고가 난다면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노태우 정부가 소련에 구애한 결과 양국 수교가 이뤄진 줄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19세기 후반 한·러 수교 무렵의 상황과는 달리 1990년 한·소 수교 당시 우위에 있었던 나라는 한국이었어요.”

김 이사장은 새 저서 ‘대한민국 100년(1948~2048) 통사’의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한국인은 더 이상 정주민(定住民)이 아니다”라고 했다.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오는 동안 이미 반 이상이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살고 있습니다. 노마드(nomad·유목민)가 된 지 오래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지금은 한국인에게 무척 위험한 상황이다. 오래도록 민주주의와 근대화를 일치된 목표로 삼고 달려왔지만 이제는 그런 공동의 목표가 희미해졌다는 것이다. “정체성이랄까 혼(魂), 에토스(ethos·정신)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치, 종교, 교육이 다시 제 역할을 하고, 무엇보다 주류 세력이 반성과 참회를 통해 거듭나야만 한다”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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