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國 언어 울려 퍼지던 촬영장… 세계인이 만든 미국의 이야기”
한국 감독, 캐나다 제작자, 베트남계 배우들이 태국에서 촬영한 드라마가 미국 방송사에서 방영되며 전 세계로 퍼졌다. 지난주 종영한 HBO 드라마 ‘동조자’는 영화감독 박찬욱이 연출·제작에 참여한 글로벌 프로젝트로, 미국 OTT 플랫폼 HBO맥스에서 TV쇼 부문 1위를 기록했다. 최근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 참석차 방한한 총괄 제작자 니브 피치먼(66)은 “촬영장에선 한국어·베트남어·영어·태국어가 동시에 들렸다. 베트남계 미국인에 관한 철저히 미국적인 이야기를 전 세계에서 온 팀원들이 만든 셈”이라면서 ‘동조자’의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응우옌 비엣타인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동조자’는 베트남전 말기, CIA 비밀 요원이자 베트콩의 스파이인 ‘대위’의 이야기를 그린 첩보 스릴러. 피치먼이 소설을 읽고 영상화를 위해 원작자를 만났을 때, 원작자가 가장 먼저 언급한 감독이 박찬욱이었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서 영감을 받았고, 소설의 DNA 중 일부는 ‘올드보이’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피치먼은 소설의 한국어 번역본이 나오기까지 기다렸다가, 7년 전 서울로 날아와 박찬욱 감독을 섭외했다.
배우 캐스팅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원작 소설은 공산당 모독이라는 이유로 베트남에서 출판되지 못했고, 드라마 역시 베트남에서 촬영 허가를 받지 못했다. 베트남인 배우를 섭외할 수 없어 미국·캐나다·호주 등 전 세계 베트남계 커뮤니티를 샅샅이 뒤졌다. 그는 “출연 배우 대부분은 베트남 출신의 이민자였지만, 두 명의 베트남 배우가 있었다”고 했다. “그 전까지 연기를 해본 적 없던 베트남 프로듀서와 영화감독이었죠. 최악의 경우 처벌을 받을 수도 있을 텐데 두렵지 않으냐고 묻자, ‘연기를 계속할 생각이 없으니 상관없다’고 하더군요.”
이스라엘계 캐나다인인 피치먼은 1980년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으로 데뷔해 감독 겸 제작자로 200여 편의 영화·TV 드라마를 만들어왔다. 그가 제작한 영화 ‘레드 바이올린’은 2000년 아카데미 음악상 수상작으로 오스트리아·캐나다·중국·영국·이탈리아에서 촬영했다. 여러 언어로 촬영되는 영화라는 이유로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피치먼은 현지 촬영을 고집했다. 문화대혁명 장면을 찍기 위해 중국을 7번이나 오가며 정부의 허가를 받아내기도 했다. “1997년 홍콩 반환을 앞두고 있던 시기라, 실제 거리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줄 알고 놀란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하기도 했죠.”
30년 넘게 동·서양을 오가며 영화와 드라마를 제작해 온 그는 “미국과 베트남, 한국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었다고 소개했다. “‘동조자’를 HBO에 제안했을 때, 코로나 유행으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중국에 대한 혐오 발언을 쏟아내던 시기였죠. 분노한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할 때’라며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타이밍이 맞았던 거죠.”
침체에 빠진 국내 콘텐츠 업계가 외국과 다양한 형태의 공동 제작을 시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피치먼은 글로벌 프로젝트에선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고 균형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할리우드는 전 세계의 인기 있는 문화를 가져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해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작품이 흘러가기도 쉽기 때문에, 문화 차이를 존중하고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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